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미군에 체포된 후 미국 마약단속국(DEA) 요원에게 인계됐다. 사진=백악관

#1. 최근 중국 측에서 ‘대만 총통’이라는 표현을 쓰지 말아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총통(總統·president)은 한 국가의 수반을 가리키는 말인데, 대만은 국가가 아니라 ‘중국의 일부’이니 총통을 쓰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대만 지역 지도자’ 같은 표현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본지뿐 아니라 국내외 일부 언론도 비슷한 요구를 받았다고 한다.

자유민주 진영의 모든 언론은 수십 년간 ‘대만 총통’이라고 써왔다. 특별한 정치적 의미가 있다기보다 대만이 사용하는 공식 호칭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느냐 마느냐와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런데 중국은 왜 지금 시점에 굳이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일까. 언론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말이다.

#2. 미국은 지난해부터 정부 차원에서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대통령을 ‘마약 카르텔 수괴’로 규정했다. 마두로가 ‘태양의 카르텔’이란 조직을 이끌며 코카인과 펜타닐을 미국에 밀수했다는 혐의로 천문학적 현상금도 걸었다.

단순 압박인 줄 알았는데, 돌이켜 보니 이는 마두로 제거 작전을 위한 명분 구축 과정의 일부였다. 아무리 ‘빌런’이라도 주권 국가의 대통령을 미국이 독자적으로 체포하면 국제법적 시비가 불가피하다. 하지만 대통령이 아니라 ‘범죄 조직 수괴’일 뿐이라면? 마두로를 잡아온 것은 ‘외국 침공’이 아니라, 군의 도움을 받아 해외에서 행한 ‘국내 법 집행(law enforcement)’이라고 우길 수 있다. 국제법과 상관없고 의회의 사전 승인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3. 러시아는 어떤가.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네오 나치’ 세력이라는 선전전을 폈고, 이를 척결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러시아가 ‘전쟁’ 표현을 금지하고, ‘특수군사작전(Special Military Operation)’이라고 쓰게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영토를 빼앗으려는 게 아니라, 네오 나치로부터 박해받는 러시아계를 구원하기 위해 군을 보냈다는 의미다. 2차 대전 때 우크라이나가 독일에 점령된 뒤 일부 국민이 나치에 협력해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던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유대인인 젤렌스키 대통령이 이끄는 현 우크라이나 정부가 나치 세력이라는 것은 억지 프레임이다. 러시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밀어붙였다.

<YONHAP PHOTO-0475> '크림대교 공격 사건' 관련 대책회의 주재하는 푸틴 (모스크바 로이터=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7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크림대교 공격 사건 관련 정부 대책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2014년 러시아가 강제 병합한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와 러시아 본토를 잇는 크림대교가 이날 공격받은 것을 두고 "러시아 국방부가 이번 테러 공격에 보복할 제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2023.07.18 clynnkim@yna.co.kr/2023-07-18 08:21:34/ <저작권자 ⓒ 1980-2023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강대국들이 패권 및 이익 추구를 위한 행동에 나서기에 앞서 제시하는 ‘명분’은 갈수록 거칠고 억지스러워지고 있다. 이들에겐 이 명분이 국제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스스로 합리화만 할 수 있다면 그만이다.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 유엔 안보리에서 비토권을 갖고 있는 강대국에 대해 국제사회가 구속력 있는 제재를 하기도 어렵다.

중국이 갑자기 별 실효도 없는 대만 총통 표기를 문제 삼는 것도 명분을 쌓는 여러 과정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대만은 국가가 아니라 중국의 일부’라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중국 입장을 재차 삼차 강조하는 건 ‘우려하는 사태’가 머지않았음을 알리는 신호일 수 있다는 얘기다. 중국 매체들이 최근 고위급 회담 뒤에 ‘상대국이 하나의 중국을 존중했다’고 발표하는 빈도도 늘었다고 한다. 중국에게 대만을 취하는 것은 침략 전쟁이 아니라 원래 내 것을 되찾는 ‘수복’일 뿐이다.

기우(杞憂)이길 바라지만, 21세기에 무력으로 이웃나라 영토를 빼앗고, 남의 나라 대통령을 잡아오는 것도 일반적인 예측의 범위를 벗어난 일이었다. 힘이 있으면 내키는 대로 휘두르고 싶어하는 본성을 국제 규범·질서라는 틀로 억누르던 ‘2차 대전 후 70년’은 인류 역사에서 ‘비정상의 시대’로 기록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