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6일 서울 세종대로에서 9·26 총파업 결단식이 열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조합원들이 주 4.5일제, 임금인상 등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장경식 기자

최근 당선된 현대차 신임 노조위원장은 주 35시간제, 이른바 주 4.5일제 시행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 현대차 노조를 비롯한 민주노총, 한국노총도 노란봉투법 통과 후 주 4.5일제를 다음 목표로 삼아 어떤 식으로든 관철하겠다고 한다. 이들은 한국의 근로 시간이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점을 근거로 든다. 반면 경영계는 노동 생산성이 낮은데 임금 조정 없이 근로 시간을 단축하면 기업 경쟁력 약화로 직결된다며 반대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내년도 예산 324억원을 투입해 주 4.5일제를 시범 도입하기로 했다. 임금 삭감 없는 근로 시간 단축이 가능한지, 줄어든 근로 시간은 누가 어떻게 보전할지 등 핵심 쟁점이 정리되지 않은 채 정책이 속도를 내고 있다. 글로벌 경쟁이 치열한 반도체 산업만이라도 근로 시간 제한을 풀어달라는 경영계의 절박한 요구는 외면하면서, 주 4.5일제 논의는 거침없이 진행하는 것이다. 국회입법조사처마저 ‘성급하게 도입하기보다 사회적 대화 기반을 차분히 갖춰야 한다’는 우려 보고서를 내놓을 정도다.

주 35시간제를 앞서 도입한 대표적 국가로 프랑스가 있다. 2000년부터 사회당 주도로 주 39시간제에서 주 35시간제로 근로시간을 단축하며 ‘노동 선진국’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당시 도입 목적은 10%를 웃돌던 만성적 실업률을 낮추는 것이었다. 기존 근로자의 노동시간을 줄이면 기업이 신규 고용에 나설 것으로 기대했지만, 결과는 달랐다. 기업들은 신규 채용 대신 생산 시설의 해외 이전, 자동화 투자 등으로 대응했다. 2005년 파이낸셜타임스는 주 35시간제를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노동시장 개혁 중 하나”라고 혹평했다.

정부는 노동자 소득 수준 유지를 위해 각종 보조금을 쏟아부었고, 기업 역시 강성 노조의 반발을 의식해 임금을 줄이지 못했다. 그 결과 ‘일은 덜 할수록 좋지만, 수입이 줄어선 안 된다’는 분위기가 자리 잡았다. 주 35시간제는 현재 빨간불이 들어온 프랑스 경제 파탄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프랑스 정부는 뒤늦게 공휴일 축소 등을 추진했지만, 거센 사회적 저항에 내각이 총사퇴하는 등 정치적 혼란만 가중됐다. 프랑스의 국가 신용 등급은 한국보다 낮아졌고, 재무장관이 국제통화기금(IMF) 개입 가능성까지 거론할 정도로 경제적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유럽 모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남아 있다.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을 예고하며 그 대안으로 유럽을 주목한 미국 경제학자 제러미 리프킨의 저서 ‘유러피언 드림’(2005년)은 한국 정치권에 큰 영향을 미쳤고, 각종 정책에서 유럽식 규제가 이상적 모델로 받아들여졌다.

환경 분야도 대표적이다. 유럽연합(EU)은 2035년부터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를 선언하며 세계 기후 리더를 자처했다. 이재명 정부에서 새로 출범한 기후환경에너지부의 신임 장관은 유럽식 모델을 추종하며 우리도 2035년이나 2040년쯤 내연차 판매를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충분한 산업 전략의 뒷받침 없이 추진한 EU 내연차 규제 정책은 중국 전기차에 유럽 시장이 잠식되는 결과를 낳았다. EU는 최근 내연차 퇴출 일정을 재조정하며 한발 물러섰다. 유럽이 시행착오 끝에 수정하려는 정책을, 우리는 이제 막 도입하려다 머쓱해진 상황이다.

EU 경제는 한때 세계 GDP에서 30% 가까이를 차지했지만, 지금은 10%대 중반까지 추락했다. 유럽 경제가 AI와 같은 미래 산업에서 존재감을 잃는 등 갈수록 쇠락해가는 데는 노동·환경 등의 과도한 규제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유럽이 문제를 인식하고 되돌아나온 길로, 우리가 뒤늦게 질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