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소년범 조진웅’ 논란을 지켜보며 개운치 않았다. 이젠 대중의 관심에서도 멀어졌지만, 정작 중요한 질문은 남겨둔 채 흐지부지된 인상이다. 논란의 출발은 소년범 전력이었다. 그러나 반응의 온도를 갈랐던 것은 범죄의 무게가 아니라 “어느 편으로 분류되느냐”였다. 정치권이 가세해 사안을 진영 논리로 재단하는 동안, 한 인간의 삶 전체는 맥락 없이 흩어졌다. 조진웅이 어떤 인격체인지 알 리 없는 사람들이 무작정 두둔하거나, 무조건 난타하는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씁쓸했다.
조진웅은 영화배우 초기에 건달이나 악역을 주로 맡았다.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조직폭력배, ‘분노의 윤리학’의 악덕 사채업자, ‘끝까지 간다’의 비리 경찰까지 폭력과 범죄의 경계에 선 인물들이 그의 얼굴과 겹쳐졌다. 이후 ‘암살’, ‘대장 김창수’에서 독립운동가를 연기하며 이미지가 달라졌다.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 홍보대사,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국민 특사, 광복절 국기 맹세 낭독으로 이어지며 어느새 공적 상징에 가까운 위상으로 올라섰다.
이 스크린 속 변화가 논란을 엉뚱하게 비틀었다. “과거 행위와 현재 책임은 어떤 기준으로 연결돼야 하는가”라는 본질은 밀려났고, 위선과 배신이라는 정치적 수사가 자리를 대신했다. 논의는 어이없는 정쟁(政爭)으로 비화했다.
이 사건이 던진 쟁점은 “소년범 전과를 공개해도 되느냐”가 아니다. 중대한 과거가 확인됐을 때, 그 사람의 현재와 이후를 어떤 잣대로 판단할 것인가다. 폭로 이후 즉각적 퇴출과 격리만이 유일한 해법인지, 다른 경로는 없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기준 보호관찰 대상 소년범 재범률은 12.6%로, 성인 재범률(4.1%)의 세 배가 넘는다. 20년 전(9.7%)보다 오히려 높아졌으며, 같은 기간 성인 재범률(6.8%)이 감소한 것과 대비된다. 소년범이 더 위험해졌다는 뜻이라기보다, 사회가 이들을 다시 받아들이는 책무에 실패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본다. 교화와 복귀를 전제로 한 소년법 취지와 달리, 현실에서 지도와 관리 체계는 미흡하다는 방증이다.
사회적 판단 역시 일관되지 않다. 어떤 과거는 “어린 시절의 실수”로 봉합되고, 다른 전력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으로 굳어진다. 그 경계를 가르는 요소는 죄질만이 아니다. 인지도, 이미지 소비 방식, 정치·사회적 입지가 뒤섞여 작동한다.
조진웅이 먼저 과거를 고백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했다면 평가가 바뀌었을까. 단정하기 어렵다. 더구나 소년법은 피해자와 접촉을 제한하고 있다. 핵심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그 선택을 어떻게 평가하고 책임으로 연결할지 사회적 기준이 안 보인다는 데 있다.
우리 사회에는 폭로와 퇴장 사이에 중간 지대가 거의 없다. 은퇴는 자발적 결단처럼 포장되지만, 선택지가 차단된 상태에서 사실상 강제일 때가 많다. 해명과 반성을 요구하면서도, 그것을 공적 책임으로 쇄신할 수 있게 설계한 장치는 빈약하다. 과거를 청산하고 재활한 사람이 다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건설적 출구는 없을까. 공개 설명이나 검증 절차, 행적을 반영한 재평가 같은 대안적 접근으로 발전적 경로를 모색하자는 건 안이한 방책일까.
조진웅이란 이름은 머지않아 잊힐 것이다. 다만 이런 논란을 정리해 사회적 공감대를 마련하지 않으면 비슷한 소동이 그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분노에는 과감하지만, 제도적 설계에는 무심한 경향이 있다. 과거를 덮자는 게 아니다. 과거가 드러났다는 이유만으로 현재를 즉각 지워버리고, 미래를 몰수하는 게 합당한지, 질문해 볼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