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트랙 국가대표팀이 두 달간 ISU(국제빙상경기연맹) 월드투어 일정을 마치고 지난 2일 귀국했다. 밀라노 코르티나 동계 올림픽 예선을 겸한 1~4차 월드투어에서 금 9개, 은 6개, 동 4개를 수확했다. 고등학생 임종언(18)이 잠재력을 증명한 성과가 있었지만, 상향 평준화된 세계 쇼트트랙의 현실을 확인한 것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개인 성적을 종합해 MVP에게 주는 ‘크리스털 트로피’는 남녀 부문 모두 캐나다 선수에게 돌아갔다. 김길리(21)와 최민정(27)이 여자 4·5위에 올랐지만, 남자 대표팀은 이탈리아·중국에도 밀려 톱5에 한 명도 들지 못했다. 다가오는 올림픽에서 ‘절대 강자’를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동계 올림픽에서 한국 쇼트트랙의 위상은 독보적이다. 하계 올림픽의 양궁 같은 대표적인 ‘효자(孝子) 종목’이다. 쇼트트랙이 정식 종목이 된 1992년 알베르빌 대회에서 김기훈이 2관왕에 오른 뒤로 2022년 베이징 대회까지 한국이 획득한 메달 79개(금 33, 은 30, 동 16) 중 53개(금 26, 은 16, 동 11)가 쇼트트랙에서 나왔다. 전체 메달의 67%, 금메달의 79%를 책임졌다.
스케이팅 인구가 많지 않고, 스케이트장 같은 인프라도 부족한 한국이 쇼트트랙 강국이 된 비결은 단순하다. 우리 선수들이 ‘혁신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체격 열세를 압도적인 스케이팅 기술로 만회하는 한국 쇼트트랙을 전 세계가 벤치마킹했다. 결승선에서 스케이트 ‘날 들이밀기’, 한쪽 발로만 코너를 도는 ‘외다리 주법’, 안쪽으로 추월해 아웃코스로 빠졌다가 다시 인코스를 차지하는 ‘호리병 주법’, 가속도를 이용해 트랙을 크게 돌면서 추월하는 ‘바깥 돌기’까지. 모두 한국이 처음 선보였고, 이젠 세계 모든 선수가 쇼트트랙의 정석으로 삼는 기술이다. 넘어지지 않으려 빙판을 손으로 짚을 때 스피드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착용하는 ‘개구리 장갑’도 한국이 시초다.
국제 무대에서의 빛나는 성과와 달리 쇼트트랙 집안 사정은 부끄러운 일이 많았다. 툭 하면 폭행·성추행 같은 사고가 터졌고, 대표팀 선발이나 훈련 때 대한빙상경기연맹과 지도자, 학부모 등이 얽히고설켜 갈등을 빚었다. ‘짬짜미’나 ‘파벌 싸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종목이 바로 쇼트트랙이다. 출신 학교나 사제(師弟) 관계 등으로 ‘라인’이 만들어지고, ‘우리 식구’가 아니면 같은 유니폼을 입은 동료도 원수가 됐다. “중국한테 지는 한이 있어도 반대파 선수에겐 져서는 안 된다”고 지시할 정도였다.
올림픽을 목전에 둔 올해도 볼썽사나운 내분이 있었다. 빙상연맹은 지난 5월 석연찮은 이유로 윤재명 대표팀 감독을 훈련에서 배제하더니 8월 말 김선태 임시 총감독을 선임했다. 하지만 김 감독이 과거 선수 관리 소홀로 징계를 받은 ‘부적격 인사’라는 지적이 나오자 불과 2주 만에 선수촌에서 내쫓고, 윤재명 감독에게 다시 대표팀을 맡겼다. 감독 선임권을 쥔 빙상연맹의 삼류 행정과 해묵은 파벌 다툼이 빚은 촌극이었다. 선수들에게 ‘훈련에만 집중하라’고 주문하기 미안할 정도다. 한 빙상계 인사는 “언젠가 한국이 쇼트트랙 최강 자리에서 밀려난다면, 그 빌미는 선수의 실력이 아닌 불투명하고 허술한 행정력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월드투어에서 돌아온 대표팀은 지난여름 지도자 공백 문제로 어수선했던 진천 선수촌에 다시 모여 올림픽 최종 대비에 들어간다. 최근 미국·캐나다·네덜란드 등이 쇼트트랙 강국으로 주목받지만, 이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팀은 여전히 한국이다. 대표팀이 내년 2월 밀라노에서 어느 때보다 단단한 팀워크로 경쟁자들과 맞서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