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9일 오후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메트로폴리탄박물관 로버트 리먼 컬렉션' 특별전이 열린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이 관람객들로 붐비고 있다. /장경식 기자

20여 년 전 파리 첫 출장 때 오르세 미술관에서 맛본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다. 끝없이 펼쳐지는 인상파 대가들의 작품에 압도돼 몇 시간을 그 안에서 보냈다. 그 후 세계적인 도시를 방문하면 그곳의 대표 미술관을 찾아보게 됐다. 국내에서 열리는 전시에도 덩달아 관심이 생겼다. 대개는 인상파처럼 특정 화파나 피카소전 같은 대가의 이름을 따라다녔다. 지난달 14일부터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 전시를 보러 갔을 때도 처음엔 인상주의라는 표현에 끌렸다. 고흐의 ‘꽃 피는 과수원’,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 르누아르의 ‘피아노를 치는 두 소녀’, 고갱의 ‘목욕하는 타히티 여인들’ 앞에서 오래 눈을 떼지 못했다. 속된 말이지만 ‘실물 영접’이 주는 감동은 컸다.

그런데 발길을 옮기는 사이, 새로운 호기심이 일었다. 이 작품들을 수집하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메트)에 기증한 로버트 리먼의 존재가 점점 무겁게 다가왔다.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19세기에 대서양을 건넌 독일 이민자 집안의 후손이 어떤 이유로 컬렉터가 되고 평생 모은 작품을 기증하게 됐나 궁금했다. 전시작 못지않게 기증자에게 관심을 갖게 된 색다른 경험이었다. 인파 속에서 관람을 마치고 돌아와 미국 이민사를 다룬 책을 찾아 읽었다. 그렇게 공부하고 지난 주말 다시 전시 현장을 찾아 두 번째 관람을 했다. 작품을 더 깊이 감상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는 만족감에 온몸이 젖었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이지만, 그중에서도 1830년부터 1920년까지는 ‘이민 홍수’ 시기로 불린다. 이 기간에만 3600만명이 대서양을 건넜다. 독일 바이마르 출신인 리먼 가문 3형제도 1840년대 미국 땅을 밟았고, 그중 둘째인 이매뉴얼이 뉴욕에 터 잡아 금융업으로 거부가 됐다. 이매뉴얼의 아들 필립과 손자 로버트는 그렇게 번 돈으로 부지런히 유럽을 오가며 2대에 걸쳐 미술품을 수집했다. 그렇게 모은 미술품 수천 점이 로버트의 사후 뉴욕 메트에 기증됐고 이번에 한국을 찾아왔다.

그림들을 보고 있자니 맨해튼 5번가의 ‘뮤지엄 마일’에 줄지어 늘어선 미술관들이 겹쳐 떠올랐다. 1847년 도미해 행상부터 안 해본 일이 없던 마이어 구겐하임이 일군 부(富)는 넷째 아들 솔로몬과 손녀 페기를 통해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꽃피었다. 헝가리 이민자 가정 출신인 에스티 로더의 두 아들 레너드와 로널드도 이름난 형제 수집가였다. 형은 입체파 위주로 작품을 모아 메트에 기증했고 동생은 메트 맞은편에 노이에 갤러리를 설립해 클림트 등을 전시한다. 뮤지엄 마일 밖이지만 뉴욕현대미술관(MoMA)을 공동 창립한 애비 록펠러, 휘트니미술관을 세운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도 이민 첫 세대가 쌓은 부를 미술품 수집과 화단 후원으로 사회에 환원한 주역들이다.

국박 전시장에 로버트 리먼의 어록이 새겨져 있다. “위대한 예술은 나만의 기쁨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것은 조상이 일군 부의 아메리칸 드림을 계승한 로버트 리먼의 문화 아메리칸 드림이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기증을 받은 1969년 메트 측은 “박물관을 헤아릴 수 없이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기증의 의미는 그 이상이었다. 리먼 가문을 비롯한 미국 부자들이 부지런히 수집하고 기증하고 미술관을 세운 데 힘입어 그때까지 경제 대국일 뿐이었던 미국이 문화 대국으로도 발돋움했다. 세계 미술의 수도가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갔다. 기업가들이 부를 쌓고 그렇게 모은 재산으로 문화를 꽃피운 생생한 사례를 전시에서 확인했다. 작품 감상 못지않은 큰 감동으로 오래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