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데헌(케이팝 데몬 헌터스)’ 열기는 식지 않고 있다. 주제가 ‘골든’은 지난주 빌보드 차트에서 3위에 자리했다. 8주 연속 1위 기록이 끝난 뒤 13위까지 밀렸지만 다시 뛰어올랐다. 그 노래를 만들고 부른 이재(34·본명 김은재)가 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잘 알려진 대로 그녀는 12년간 유명 연예 기획사(SM엔터테인먼트) 연습생이었다. 연습생은 ‘인턴’이다. 정직원(데뷔)으로 상승하기 위한 준비 단계이자,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다림의 시간이다. 그녀는 11세부터 23세까지, 빛나야 할 청소년기를 연습실에서 보냈다. 함께 땀 흘리던 또래들은 소녀시대, 샤이니, f(x), 레드벨벳 등으로 데뷔해 무대 위로 날아올랐지만, 계속 ‘연습생’으로 남아 있었다. 그 시절을 쓸쓸하게 회고했다. “‘어린 이재’에게 미안함이 있어요.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게 했으니까요.”
연습생이 되는 것조차 좁은 문이지만, 데뷔는 더 바늘구멍이다. 쏟아지는 아이돌 그룹 중 3년을 버티는 팀은 10%도 되지 않는다. 데뷔한 지 5일 만에 해체한 아이돌 그룹도 있었다. 데뷔는 도착점이 아니라 출발선인 셈. 이재는 그 활주로도 밟지 못한 채 성인이 됐다.
“새벽 7시에 연습실에 가서 밤 11시에 나왔어요. 춤 6시간, 노래 6시간 하다가 기절도 했죠.” 노력한다고 곧바로 문이 열리진 않았다. “열심히 했는데 ‘왜 나는 데뷔 못 하지? 나는 많이 부족한가 봐’ (끊임없이) 생각했어요.”
나이가 들면서(아이돌은 대부분 10대에 데뷔한다)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 보였는지 연습생 계약조차 종료됐다. 당시 23세. “계약을 끝내고 택시를 타고 집에 오는데 눈물이 계속 났어요.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그래도 음악이 좋았던 그녀는 작곡으로 눈을 돌렸고 그로부터 10여 년이 흐른 지금 그야말로 글로벌 벼락스타가 됐다. 그토록 꿈꿨던 가수로서 첫발도 화려하게 내디뎠다. 영광은 하루아침에 주어진 게 아니다. 오랜 시간 눌러 담아온 좌절과 희망, 포기하지 않은 마음이 만들어낸 울림이다.
대담하던 사회자가 위로하듯 말했다. “노력은 언젠가 빛을 본다.” 왜 그런 말을 건넸는지는 알겠지만, 그 발언은 절반의 진실이다. ‘노력하면 언젠가 보상받는다’는 상투적 충고는 올바르지 않고 현실을 반영하지도 않는다.
이재가 성공을 얻지 못했더라도, 그녀가 꿈을 붙잡고 살았던 시간은 가치가 있다. 꿈은 실현 여부로 평가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 꿈을 품고 매일을 살아낸 사람에게 새겨진다. 성공은 반전의 찰나가 아니라,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낸 시간의 기록이다. (이재처럼) 끝내 데뷔라는 행운을 손에 넣지 못하고 다른 길을 걷게 된 수많은 연습생도 결코 실패자가 아니다. 그들의 시간 역시 낭비되지 않았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전설적 투수 랜디 존슨은 기대를 받고 프로 생활을 시작했지만 29세까지는 ‘미완성 유망주’에 머물렀다. 스트라이크를 제대로 던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통 투수들은 내리막을 걷는 서른 살이 되어서야 제구가 잡혔고, 이후 최고 투수에게 주는 사이영상을 다섯 번 받았다. 그는 끈질기게 버텼다. 버틴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그 보상이 꼭 찬란한 결과일 필요는 없다. 시간의 결 속에 그 노력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한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한 사람 인생을 ‘도착점’으로 요약하려는 습성은 버리자. 어떤 사람은 빠르게 도착하고, 어떤 사람은 천천히 간다. 중요한 건 도착이 아니라 계속 걷는 일이다. 삶을 완성하는 건 ‘무대 위’가 아니라 ‘무대에 도달하기까지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