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지난달 전승절 열병식에서 선보인 잉지(鷹擊·YJ)-21, 둥펑(東風·DF)-26D는 미국을 겨냥한 극초음속 무기다. 대함 미사일 잉지-21은 ‘항모 킬러’, 중거리 탄도미사일 둥펑-26D는 ‘괌 킬러’라고 한다. 지난주 중국 관영 매체는 이 무기들의 개발 과정을 소개하면서, 20년간 극초음속 기술 한 우물을 판 베이징대 석학 황린 교수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황린의 스승이 중국 ‘양탄일성(兩彈一星·원자폭탄, 수소폭탄, 인공위성)의 아버지’ 소리를 듣는 ‘국민 영웅’이라는 점을 부각했다.
첸쉐썬(錢學森). 이 이름 석 자는 중국 군사·과학 굴기(崛起)를 논할 때 빠짐없이 등장한다. 첸의 스토리가 더 극적인 것은 그가 중국의 영웅이기 전에, 미국 탄도미사일과 우주개발의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미 핵·미사일 개발에 기여하고 미국 시민이 되길 원했던 천재 과학자가, 미국에서 버림받고 결국 미국을 위협하는 ‘비수’로 돌아온 과정은 지금 봐도 시사점이 크다.
상하이 출신인 첸은 스물네 살이던 1935년 미국으로 건너가 MIT를 거쳐 칼텍에서 항공역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대 최고 항공역학 권위자 폰 카르만의 지도로 로켓 개발팀에 합류해 2차 대전 때 미군 무기 개발에 큰 공을 세운다. 탄도미사일 유도 기술, 고체 연료 미사일 개발에 성공했다. 그가 원자폭탄 개발 ‘맨해튼 프로젝트’와 나치 독일 과학자 심문에 참여한 것은 미 정부의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첸도 미래를 위해서는 소련이 아닌 미국이 우주개발을 주도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로켓 개발에 몰두했다. 이런 노력은 미국 ICBM 및 달 탐사 로켓 개발의 초석이 됐다.
하지만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고 미국에 반공 매카시즘 광풍이 불면서 모든 게 바뀐다. 1950년 6월 첸은 공산주의자로 몰려 FBI에 체포됐고, 이후 5년 동안 가택 연금을 당한다. 이런 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6·25전쟁 때 포로로 잡은 미군 조종사 11명과 첸을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1955년 미국이 이를 받아들이자 첸은 “다시는 미국 땅을 밟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중국으로 돌아간 첸은 마오의 전폭적 지원 아래서 중국 군사·과학기술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렸다. 중국 과학원 역학연구소를 창설한 그는 탄도미사일과 핵 개발 총책임을 맡아 원자폭탄(1964년) 수소폭탄(1967년)을 잇따라 개발하고, 1970년 인공위성 발사까지 성공했다. 중국이 초강대국 도약 기틀을 다진 것은 이때다.
중국 공산당은 첸을 국가 영웅으로 추앙했고, 수많은 젊은 인재가 그를 따르겠다며 이공계로 투신했다. 이 ‘첸쉐썬 키즈’는 각종 우주 발사체, 탄도미사일, 핵잠수함 개발에 성과를 내고 있다. 극초음속 무기의 황린도 그중 하나다. 만약 첸이 미국에 남아 있었다면? 인류 최초 인공위성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 쏘아 올렸을지 모른다. 중국이 미국의 패권을 넘보는 것도 상당 기간 늦춰졌을 가능성이 크다.
미·중 경쟁의 최종 승자를 놓고 미국에 베팅하는 많은 사람은 그 근거로 전 세계 우수 두뇌를 빨아들이는 미국의 열린 교육 시스템을 들곤 했다. 심지어 중국 인재들도 자유로운 연구가 보장된 미국으로 가길 원했다. 하지만 지금 트럼프 행정부의 적대적 이민 정책은 ‘자국민 일자리’를 이유로 중국 및 해외 인재 유입을 막고 있다. 이렇게 미국이 걷어찬 인재 중 미국의 미래를 위협하는 ‘제2, 제3 첸쉐썬’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다. 정치 논리가 과학을 흔들 때 후과는 이렇게 치명적일 수 있다. 우리도 새겨봐야 할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