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부 시대 일본의 검객 미야모토 무사시는 평생 60번 넘게 싸워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쓴 전기에 그가 무패의 경지에 오른 비결이 실려 있다. 미야모토가 창안했다는 이도류(二刀流)의 위력 때문인 줄 알았더니 그게 다는 아니었다. 미야모토는 자기보다 약한 상대하고만 싸웠다. 치졸한 승률 쌓기 같지만 시바는 여기에서 교훈 하나를 끌어낸다. 싸울지 말지 결정하려면 자신과 상대의 실력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것. 지피지기(知彼知己)해 무모한 싸움을 피하는 지혜다.
1923년생인 시바는 스물두 살 때 조국의 패망을 지켜보며 “어째서 일본인은 이렇게 바보가 된 걸까” 자문했다. 그가 쓴 소설들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 찾기였다. 그에게 일제의 패망은 무모한 대결을 피한 미야모토의 지혜를 외면한 참혹한 대가였다. 이런 생각을 그만 가진 게 아니다. 전후 일본의 많은 지식인이 자기보다 센 나라에 대들었다가 패전국 멍에를 쓰고 국민 수백만 명을 죽게 한 실수를 반성했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지난주 낸 ‘전후 80주년 메시지’도 그런 반성의 연장선에 있다. 그는 전쟁을 피하지 못한 이유로 군 통수권을 문민 통제 하에 두지 못한 헌법상 맹점과 정부·의회의 무능을 지적했다.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보다 정신적, 정서적 판단을 중시해 나라가 나아갈 길을 그르친 역사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고도 했다.
이시바의 메시지에는 정치인의 충정이 담겼지만 한계도 뚜렷했다. 그는 식민 지배를 사과한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한다고 했을 뿐, 자신의 말로 직접 반성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총리 담화가 아닌 개인 메시지 형식이었다. 일본 우익의 눈치를 봤을 것이다. 그의 반성이 향한 곳도 1931년 만주사변에서 시작해 태평양전쟁으로 폭주하다 패망에 이른 1945년까지로 한정됐다.
일본 과거사 반성의 실체가 궁금하던 차에 일본 정치학자 가타야마 모리히데의 저서 ‘미완의 파시즘’에서 “반성의 실체가 이런 거였나” 싶은 대목을 읽은 적이 있다. 저자는 일본을 ‘가지지 못한 나라’로 규정하고 그런 일본이 ‘가진 나라’ 미국과 벌인 싸움에 국민을 몰아넣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몸의 크기를 알아차리자. 발돋움이 잘 되었을 때의 기쁨보다 굴러떨어졌을 때의 고통이나 슬픔을 상상해 보자’고 했다. ‘고통’ ‘슬픔’이란 단어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했다. 그 단어들은 일본인만을 대상으로 한 것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반성의 실체라면 일본이 발돋움해 가진 나라가 됐을 때 무슨 일을 벌일지 두려웠다.
가토 요코 도쿄대 교수는 종전 70주년을 맞아 낸 저서 ‘왜 전쟁까지’에서 일본이 전쟁을 피할 기회가 세 번 있었다고 했다. 마지막 기회는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 미·일 교섭이었다. “교역을 통해 세계에 진출한다면 도와주겠다”며 미국이 내민 손을 뿌리친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다고 질타했다.
동시대를 식민지 처지로 지낸 우리가 이런 역사 인식에 마냥 반색하기는 어렵다. 가토 교수 말대로 일본이 미국의 충고를 받아들였다면, 심지어 독일과 맺은 동맹을 끊고 승전국 대열에 섰다면 우리는 식민지 굴레를 벗지 못했거나 독립이 상당히 미뤄졌을지 모른다. 우리의 독립은 미국과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일본이 오판한 덕을 크게 봤다. 이것이 일본 패망을 보는 우리의 역사 인식이어야 한다. 일본은 힘의 논리로 과거를 반성하는 나라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나라와 공동 번영을 추구하고 북핵 위협도 함께 대처하는 게 우리의 숙명이란 것도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러기에 미야모토처럼 상대를 잘 알고 있어야 하고, 일본의 역사 인식이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