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의 일이다. 서울에 근무하는 주한 외교관과 외국 특파원, 정부 공무원, 외교·안보 담당 기자 20여 명이 저녁을 함께했다. 가을 저녁의 상쾌한 바람에 모두 웃었지만, 대화 주제는 가볍지 않았다. 31일 개막하는 경주 APEC 정상 회의 전후에 한반도에서 돌발 변수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많았다. 이달 초 최소 7일간의 연휴에도 마음 편히 쉴 수 없다는 하소연이 이어졌다. 누군가 “앞으로 한 달간 긴장을 풀 수 없다”며 ‘옥토버 서프라이즈’를 거론했다.

‘10월의 충격’으로 번역되는 이 말은 원래 미국 대선과 관련돼 쓰여 왔다. 4년마다 11월 초에 실시되는 미 대선에서 10월에 돌발 사건이 발생, 판도를 흔들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이 한반도와 관련, 처음 쓰인 것은 2004년 9월 북한 양강도에서 대규모 폭발이 일어났을 때였다. 미국 언론은 핵 시설과 연관됐을 가능성을 집중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북한의 10월 핵실험 가능성을 거론하며 ‘옥토버 서프라이즈’의 전조로 해석했다.

상당수 전문가는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공기가 심상치 않다며 이달 중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트럼프, 시진핑, 김정은의 움직임에 따라 정세를 확 바꾸는 ‘사건’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가장 주목받는 건 역시 미·북 정상회담이다. 회담이 성사될 확률은 낮다는 견해도 있지만, 아예 불가능하다고 단정하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김정은은 비핵화 조건으로 “미국과 마주 설 수 있다”고 밝혀 절반쯤 응낙한 셈이다. 주한 미국 대사관도 이에 대비, 여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9년 6월 트럼프가 오사카 G20 정상 회의 중 트위터로 회동을 제안, 30여 시간 만에 판문점 회담이 성사된 전례가 있다. 트럼프가 한국에서 깜짝 회동을 추진한다면 ‘당일치기’도 가능하다.

트럼프와 시진핑의 정상회담도 6년 만에 다시 열릴 가능성이 있다. 이미 지난달 세 시간 동안 통화하며 탐색전을 벌인 데 이어 한국에서 직접 ‘링’에 오를 태세다. 두 사람이 동북아 세력 균형에 대해 합의할 경우, 초대형 뉴스가 될 수 있다. 시 주석이 평양을 들렀다 한국을 방문하는 시나리오도 완전히 배제하긴 어렵다.

일본 변수도 가볍지 않다.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1·2위를 다투는 다카이치와 고이즈미 모두 A급 전범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 단골 참배객이다. ‘여자 아베’ 다카이치는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에 장관급을 보내겠다는 발언도 했다. ‘다카이치 총리’가 현실화할 경우, 한·미·일 협력은 물 건너갈 수 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격랑(激浪)이 일고 있는데, 이재명 정부는 어디에 서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나. 이 대통령은 유엔에서 적극적인 다자 외교를 통해 네트워크를 넓혔어야 했는데, ‘윤석열 계엄 극복’과 북한 문제만 강조한 채 귀국했다. 전 정부의 특임 대사·총영사 30여 명을 ‘적폐’라며 소환 후 4강 대사만 정하고, 해야 할 후속 인사를 하지 않아 전 세계 공관장의 4분의 1이 공석이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나면 환상적일 것”이라며 ‘박수 부대’ 역할에 머물 뿐, 상황을 주도적으로 타개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한반도를 둘러싼 새로운 건축물이 만들어지는데, 우리는 제대로 된 설계도를 갖고 있나.

한미 관계에서도 어떤 복안이 있는지 알 수 없다. 3500억달러 투자 문제로 이 대통령이 “탄핵당한다”고 하자 트럼프가 “그건 선불”이라며 맞받아쳐 갈등이 커지고 있다. 여당 일각과 민노총은 트럼프를 때리기 시작했다. 20년 전 부산 APEC 때 열린 노무현·부시 회담처럼 “최악의 정상회담(버시바우 전 주한 미 대사)”이 재연되지 않을지 조마조마하다. ‘옥토버 서프라이즈’가 한미 관계에서 나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