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여 전 새 정부 출범 직후 일이다. 한 준(準)공기업 대외 협력 담당 간부는 현직 대표 재임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따라붙는 ‘(대표) 사퇴 압박’은 피할 수 없는 운명에 가까웠다. 대표와 동반 생명 연장을 꿈꾸던 그는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때 평소 가까이 지내던 검찰 관계자가 귀띔했다. “건진을 만나보면 도움이 될 거다.” 소문만 무성하던 그 도사. 정말 통할까. 반신반의(半信半疑)했지만 상황이 급박했다. 게다가 ‘검찰 추천’ 아닌가.
서울 강남 모처에서 마주한 건진은 “설명하기 힘든 아우라가 감돌았다”는 게 그의 회고다. 사정을 털어놓자 건진은 대뜸 한 IT 업체 투자를 권했다. 30억원 남짓한 규모. 건진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회사였다. 혼자 결단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상의했지만 곤혹스러운 반응이 나왔다. 자칫 배임이나 뇌물, 횡령으로 번질 수 있는 뇌관. 돌아와 “힘들겠다. 다른 길은 없겠냐”고 묻자 건진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그는 쫓겨나듯 방을 나왔다. 밖에는 다른 공기업 임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역시 연임을 바라는 대표가 배후에 있는 곳이었다. 의도는 뻔했다.
그 대표는 끝내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후임은 낯선 얼굴이었다. ‘무늬만 공모’였고, 실상은 ‘용산 낙하산’이라는 뒷말이 파다했다. 사석에서 “농사짓던 사람을 데려와 꽂았다”는 ‘무용(武勇)담’을 늘어놓은 정부 고위 인사도 있었다고 한다.
훗날 그는 “그때 (건진에게) 과감히 걸어볼걸 그랬나” 하고 잠시 후회했다. 그렇다고 결과가 달라졌을까.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고 자위한다. 특검의 칼끝이 자신을 겨눌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당시 국내 유수 대기업 대외 담당자 가운데 건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고 단언했다. 누가 권력을 틀어쥐고 흔드는지 알아내려 모두가 혈안이던 시절. 로비 창구는 건진만이 아닐 터였다. 아마 그 미로(迷路)의 끝에는 ‘대통령 부인’이 있었을 것이다.
민주화 이후에도 비선과 그림자 실세가 얽힌 부패극은 정권을 초월해 되풀이된다. 주연만 바뀐 채 재탕하는 희비극이다. 미국에 ‘키친 캐비닛(Kitchen Cabinet)’이 있고, 일본에도 ‘관저(官邸) 정치’가 있다지만, 한국처럼 ‘무한 루프(infinite loop·컴퓨터에서 프로그램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를 이어가는 나라는 드물다.
지금 도마에 오른 인물은 전직 검찰 총수 배우자이기도 하다. 수사 중인 사안이니 성급한 단정은 금물이다. 그럼에도 흘러나온 정황만 보면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숱한 수사 과정을 옆에서 지켜봤을 텐데 학습 효과가 전혀 없었을까. 언젠가 다 드러난다는 걸 몰랐을까. 수사 속성을 잘 아는 지인은 그 속내를 이렇게 요약했다. “안 걸리면 돼.”
수사는 표적이고 처벌은 미완이다. 정권이 바뀌면 사면이란 면죄부가 주어진다는 기대도 작동한다. 경제학적으로 부패는 고위험·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 상품이다. 위험을 감수한 로비가 성사되면 안개를 헤치고 금맥을 발견한 것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적발 가능성이 낮고, 형벌도 약하다는 걸 간파한다면 (청탁) 이익이 (위험 감수) 비용을 웃돈다. 이때 부패는 ‘합리적 선택’으로 포장된다. 한국식 대통령제는 이 메커니즘을 더욱 강화한다. 제왕적 권력은 인사·예산·사업을 틀어쥐고 충성 경쟁과 이권 개입을 재생산한다. 권력 안팎을 감시하는 견제 장치는 허술하고 제도는 불투명하다. 비리는 개인 일탈이 아니라 구조적 산물인 셈이다. 이 정부 역시 경계를 늦췄다간 5년 뒤 같은 악몽을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