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의 특별사면 발표로 수감 생활 8개월여 만에 풀려나는 조국 조국혁신당 전 대표가 지난 달 15일 새벽 서울 구로구 서울남부교도소에서 출소하며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박성원 기자

2023년 3월 21일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산업부 장관에게 한일 화이트리스트(수출 절차 간소화 우대국)를 원상회복하는 조치를 신속하게 밟으라고 공개적으로 지시했다. 윤 대통령은 그 닷새 전 일본에서 기시다 총리와 화이트리스트 복원에 합의하고 이를 발표했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후속 조치 발표를 미적거렸다. 윤 대통령은 일본 집권 자민당의 최대 파벌인 아베파의 견제가 작동하고 있다고 보고 한국 정부의 선제 조치를 통해 기시다 총리의 입지를 만들어주려 한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나서야 화이트리스트를 복원했다.

일본 사회에 ‘자전권력(自前の權力)’이라는 말이 있다. 주류 파벌·정파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의사를 관철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스스로 구축한 권력이란 뜻이다. 기시다는 자민당 내 3위 파벌 출신이다. 아베파에 얹혀 있는 총리란 평을 들었다. 기시다 사례에서 보듯 자전권력을 갖지 못한 비주류 출신 수장의 권력에는 한계가 있다. 기시다의 정치적 입지 부족을 걱정했던 윤 전 대통령 역시 정치적으로 침몰한 것도 총선 패배로 자전권력 구축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번 8·15 특별사면을 두고 불거진 논란을 보면서 이재명 대통령의 자전권력은 어느 정도일까 궁금해졌다. 조국 전 의원 사면 후폭풍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민주당 당대표 시절 ‘일극(一極)’으로 불렸다. 이 대통령이 지난 대선 당시 강성 지지층의 반발을 무릅쓰고 “민주당은 중도 보수 정당”이라고 천명했을 땐 정말 일극으로 보였다.

실제로 작년 총선을 앞두고 현 여권 주류 원로 그룹에선 민주당 공천위원장으로 한 인사를 추천했다고 한다. 하지만 민주당 당대표였던 이 대통령은 다른 인사를 임명했다. 총선 압승 후 이 대통령이 윤 전 대통령과 영수 회담을 하겠다고 밝혔을 땐, 원로 그룹에서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압박도 상당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은 “이런 것도 뜻대로 못 해서야…”라면서 회담을 강행하더라고 한 여권 인사는 전했다.

그런 이 대통령이 취임 두 달 만에 징역 2년 형기(刑期)를 33%밖에 채우지 않은 조 전 의원을 사면했다. 조국 사면은 중도 보수층의 이탈을 불러올 게 분명했다. 조국 사면 후 이 대통령 지지율은 떨어졌다. 8·15 사면을 앞두고 공개적으로 나선 문재인 전 대통령 말고도 물밑에서 고위 성직자와 노동계 유력 인사 등이 조 전 의원 사면을 강력히 요청했다고 한다. 조 전 의원은 출소 후 종횡무진하고 있다. 입법권과 행정권을 손에 쥔 ‘일극 대통령’이란 평가는 ‘착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조 전 의원은 마치 이 대통령의 권력 자장(磁場) 밖에 있는 듯하다.

이 대통령은 대선 캠페인 초기에 ‘성장’ ‘먹사니즘’을 내건 중도 실용 노선을 천명했다. 하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후 상법 개정안, 노란봉투법 등 여권 강경파가 밀어붙이는 ‘더 센’ 법안에 동의했다. 70여 년간 이어져 온 형사 사법 체계의 근간을 바꿀 검찰의 수사·기소 기능 분리를 두고도 속도 조절을 주문했지만, 강경파들은 더 속도를 내고 있다. 이 대통령은 최근 일본 언론 인터뷰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내심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그런 그는 최근 국무회의에서 검찰 수사·기소 분리 문제 등과 관련해 “국민 앞에서 합리적으로 논쟁하고 토론하라”고 지시했다. 이 대통령이 한국 사회의 향방을 가를 독자적 힘을 구축할 때까지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라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