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위스콘신주 제인스빌은 GM 자동차 공장 덕에 먹고사는 공업 도시였다. 2008년 GM 공장이 문을 닫으며 시련이 닥쳤다. 대출금을 갚지 못한 집이 매물로 쏟아졌고 자살자가 속출했다. 일부는 운 좋게 다른 지역 공장에 재배치됐다. 그런 이들은 주말에만 집에 간다고 해서 ‘GM 집시’라 불렸다. GM 집시의 자녀는 철이 일찍 들었다. 주말엔 아빠와 함께 있기 위해 친구들과 약속도 잡지 않았다. 제인스빌 사람들은 이 불행의 원인을 미국 밖에서 찾았다. 독일·일본·한국·중국 같은 국외 제조업 강자들 탓이라고 했다. 이 분노에 정치인들이 올라탔다. 트럼프는 대선 이슈로 삼았다. 그의 모토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의 핵심이 제조업 부활이다. 관세 장벽을 세우고 투자를 유치해 미국 땅에 미국인을 위한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조업 쇠락의 진짜 이유를 외면했다.
미국 러스트벨트는 미 중서부의 쇠락한 공업지대를 뜻한다. 미국 부통령 J D 밴스는 대표적 러스트벨트인 오하이오주 미들타운의 가난한 노동자 가정 출신이다. 밴스 같은 이들을 미국에선 힐빌리라 한다. 힐빌리 출신인 그가 성공하기까지 과정을 쓴 자서전이 ‘힐빌리의 노래’다. 영화로도 제작돼 수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영화가 보여준 자수성가 스토리는 그가 책에 쓴 내용의 절반만 보여줬을 뿐이다. 밴스는 그 책에서 미국 러스트벨트는 왜 지금처럼 망가졌으며 어째서 가난에 빠지게 됐는지 분석한다. 미국 입장에선 숨기고 싶은 얘기, 들춰보고 싶지 않은 진실이 그 안에 담겨 있다.
밴스가 집중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미국인의 타락한 노동 윤리다. 다음은 책 내용의 일부다. ‘밥은 일주일에 한 번꼴로 결근했고 툭하면 지각했다. 하루에 서너 번씩 화장실 간다며 자리를 비웠고 그때마다 30분 넘게 쉬다가 돌아왔다.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들은 중서부 산업지대가 쇠퇴하고 백인 노동계층의 경제 축이 무너지는 현 상황을 우려한다. (그러나) 내가 목격한 현실은 거시경제적 추세나 동향보다 훨씬 더 깊은 문제다. 요즘엔 고된 일을 기피하는 젊은이가 너무 많다.’ 그들은 ‘노동을 재능만큼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며’ ‘주당 30시간 미만 일하면서 자신이 게으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미국 내 다른 민족 집단보다 불평은 더 많으며’ ‘자기 인생에 얼마 있지도 않은 가치마저 산산이 부수는 마약쟁이’들이다.
한국에서 미국 현지 공장에 파견 나간 관리자들은 물건을 만드느라 힘든 게 아니라 나태하고 무책임하며 툭하면 회사에 소송을 걸어 돈 뜯어낼 궁리나 하는 직원들 때문에 힘들다고 한다. 좋은 직원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약물 남용과 범죄에 빠져 노동시장에서 이탈한 20세 이상 55세 미만 청·장년층이 120만명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 이런 나라가 어떻게 제조업을 부활시켜 위대해질 수 있는가.
미제(made in USA)가 세계를 지배하던 게 불과 한 세대 전이다. 필자는 20대 몇 년을 미국 젊은이들과 함께 지낸 적이 있다. 세계 최강 제조업 국가의 국민은 순박했고 우직하게 일했다. 꾀를 부릴 줄도 몰랐다. 제조업 강국 미국은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 같은 천재만의 나라가 아니었다. 미국은 그들의 혁신 아이디어를 공장에서 땀 흘려 제품으로 만들어내는 성실한 일꾼의 나라였다.
미국은 위대함을 잃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강대국이다. 대형(大兄)의 힘자랑은 한국 같은 나라에 큰 시련이 아닐 수 없으니 비상한 각오로 이 시기를 견딜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미국의 현실이 반기업적인 풍토가 확산하고 일하지 않는 분위기가 득세하는 우리 노동 현장을 돌아보게도 한다. 우리의 노동 윤리는 태평양 너머에서 닥쳐온 큰 파도를 헤쳐나갈 만큼 강건하긴 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