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 미국 프로야구 보스턴 레드삭스의 알렉스 코라 감독은 딸 커밀라 대학 졸업식 참석을 이유로 자리를 비웠다. 고작 한 경기. 일부 스포츠 라디오 진행자들이 시비를 걸었다. “책임감이 없다.” “리더십이 부족하다.” 프로 세계에서 팀보다 우선하는 일이 있느냐는 논지였다. 코라는 물러서지 않았다. “딸이 내가 오길 간절히 바랐다. 굳이 납득시킬 생각 없다.” 짧지만 아버지로서 확고한 신념이 담긴 응답이었다. 반응은 나뉘었다. “감독이 사적인 일로 빠지는 게 말이 되느냐”는 목소리와 “162경기 중 하루쯤 가족을 위한 선택이 뭐 그리 큰 문제냐”는 반론이 맞섰다. 구단과 선수들은 말없이 그의 편에 섰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2017년 리투아니아 프로농구 플레이오프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잘기리스 카우나스 주전 센터 아우구스토 리마는 첫아이 탄생을 곁에서 지키기 위해 출전을 포기했다. 경기는 패했고, 한 기자가 감독에게 따져 물었다. “시리즈 도중 중심 선수가 아내 출산 때문에 빠진 걸 어떻게 생각하느냐.” 감독은 찡그리며 되물었다. “어떻게 보냐고? 내가 가라고 했다.” 질문이 이어졌다. “그게 과연 맞는 선택인가.” 그는 조용히 되물었다. “아이가 있나?” 그리고 ‘훈계’를 이어갔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보다 위대한 일은 없다. 우승도, MVP도 그 감정을 대신할 수 없다. 리마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다.” 출산을 지켜본 뒤 돌아온 리마는 “감독님께 너무 고맙다. 더 좋은 경기력으로 보답하겠다”고 했다. 팀은 남은 시리즈를 모두 이기고 결국 챔피언에 올랐다.
가정과 일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순간, 우리는 무얼 먼저 둘 것인가. 이 물음은 늘 껄끄럽다. 스포츠인뿐 아니라 직장인이라면 이런 장면이 다가오지 않길 바라며 산다. 하지만 언젠가 마주칠 수밖에 없다. 어느 사회든, 개인 사정을 지우고 일에 몰두하는 태도를 충성으로 치켜세우는 풍토가 있다. “집안일 때문에…”라는 말은 종종 핑계로 치부되고, 아내 출산에 맞춰 휴가를 내려 하면 “네가 낳냐”는 조롱이 따라붙는다. 아이가 태어나던 순간을 놓친 아버지들의 뒤늦은 후회는 대물림되고, 회의 때문에 유치원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한 엄마는 집에 돌아와 울고 있는 아이 앞에서 눈치를 살핀다. 운동회 날, 교실에서 “우리 부모님은 바빠서 못 왔어”라고 말하는 아이는 이미 어른의 언어를 빌린다. 그렇게 가족을 둘러싼 슬픈 이야기들은 일상의 일부로 세습된다. 출산율이 왜 그렇게 낮아졌는지 묻기 전에, 이런 고립된 풍경 속에서 원인을 찾아보라.
2003년 12월, 미식축구 전설 브렛 파브는 아버지를 심장마비로 잃고 다음 날 장례식장이 아닌 경기장에 섰다. 주전 쿼터백으로 출전해 399야드 패스를 성공시키며 41대7 대승을 이끌었다. 경기 후 그는 울먹였다. “아버지도 내가 뛰길 원하셨을 것이다. 오늘 승리를 아버지께 바친다.”
‘일이냐, 가족이냐’는 식으로 선택을 강요하는 이분법은 부당하다. 삶의 흐름 속에서 우선순위는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을 미뤄야 할 순간도 있지만, 때로는 세상 어떤 성취보다 소중한 자리가 있다. 회의 한 번, 보고서 한 장보다 자녀의 생일, 부모와 마지막 작별, 아이 첫 발걸음이 더 오래 남는다. 기억은 함께 보낸 시간 속에 머문다. 중요한 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원칙을 세우고, 그것을 지켜내는 태도다. 그리고 그런 결정을 존중하고 뒷받침하려는 사회적 분위기다. 선택에는 정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