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이야기를 먼저 하려고 한다. 일기장에나 써라 같은 비난을 할 터이지만, 개인의 내밀한 고백은 역사를 기록(기억)하는 미시사의 한 방법이 된다.
1987년은 대학 2학년 때였다. 4·13 호헌조치는 대통령 직선제 열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6월 10·18·26일로 이어진 거리 시위에 나섰다. 서울시청·남대문 인근에서 “호헌 철폐, 독재 타도” 구호를 외쳤다. 전경이 쏜 최루탄 가루를 뒤집어쓰기도 했다. 이때 시위가 6·29 선언에 이어 현행 대통령 직선제 헌법을 이루는 계기가 됐다면 필자도 ‘87년 체제’에 모래알만큼은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4·19세대나 6·3세대처럼 그때 우리를 훗날 ‘6·10세대’로 부를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일부 운동권이 30대부터 세금 쓰는 자리에 앉아 민주화 열매를 오로지 따먹으면서 ‘386세대’라는 족보 없는 작명이 탄생했다.
국회가 대통령 탄핵안을 처음 의결한 2004년 3월 중순, 마침 대학 동기 모임이 있었다. 친구는 흥분해 있었다. 직선 대통령 탄핵은 민주주의 파괴라며 열을 냈다. 반박했다. “국회에서 탄핵안을 의결했고 이제 헌재에서 판단하면 된다. 민주주의는 절차를 지키는 것이다. 절차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 친구는 벌떡 일어나 술병을 쳐 깨뜨리더니 소리쳤다. “야, 이 XX야, 너 조선일보에서 출세해라, 이 개XX야!” 친구의 축복(?)은 과분한 일이었으나, 욕설 퍼붓고 위력을 보인 행동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았다. 학생 때 시위 한번 나간 적 없는 친구는 왜 뒤늦게 ‘투사’가 된 것일까.
두 번째 대통령 탄핵안 의결 때 촛불 든 분들의 충심(衷心)은 이해했다. 그러나 ‘촛불 혁명’이란 작명엔 동의할 수 없었다. 탄핵안 의결, 헌재 결정, 조기 대선으로 이어진 과정은 헌법 질서를 넘어선 혁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탄핵에 수긍하든 안 하든 절차에 따랐고, 그것이 민주주의였다.
다산 정약용은 100년을 내다봤다. 1817년 쓴 ‘경세유표’에서 “지금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했다. 책의 원제는 ‘방례초본(邦禮草本)’이다. 나라[邦]의 예(禮)에 대한 책이란 뜻이다. 서문에 썼다. “여기서 논하는 것은 법(法)이다. 법이면서 예(禮)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옛 성왕은 예로 나라를 다스리고 예로 백성을 인도했다. 예가 쇠퇴해지자 법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법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백성을 인도하는 것도 아니다.”
‘논어’에 따르면 예란 절차를 지키는 것일 뿐이다. 공자는 태묘(종묘)에 들어가자 제사 절차에 대해 계속 물었다. 누군가 조롱했다. “누가 공자가 예를 잘 안다고 했나. 계속 (절차를) 묻던데.” 공자는 말했다. “그(렇게 묻는)것이 예다.” 21세기에 웬 공자님 말씀이냐고? 현대의 정치학자인 하버드대 스티븐 레비츠키, 대니얼 지블랫 교수가 말하는 민주주의 규범과도 통한다. 두 교수는 상대를 인정하는 ‘상호 관용’, 법적 권한을 신중히 사용하는 ‘제도적 자제’를 민주주의 핵심으로 꼽았다.
1987년 이후 직선 대통령 입에서 계엄이란 말이 나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스스로 아무리 적법을 주장해도 국민에 대한 예(禮)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국회에서 탄핵안이 의결된 것이다. 그러나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체포·구속으로 이어진 과정, 이후 법원 난입 폭력 행위는 과연 절차에 따른 것인가. 서로 적법하다 주장하며 법을 무화(無化)하는 상황일 때 더 신중하게 지켜야 할 것은 절차일 뿐이다. 탄핵안이 헌재로 넘어갔으니 신중히 절차를 따르고 결정을 기다릴 순 없었나. 다산 같은 선각자라면 이 무법 무례를 뭐라고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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