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준 대법관 후보자가 지난달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했던 말 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재판 지연’에 대한 진단이었다. 그는 그 원인으로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 폐지’와 ‘법원장 후보 추천제’를 꼽았다. 승진제 폐지 이후 “(판사들이 재판 지연) 통계에 신경을 안 쓰게 되니까 폐단이나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했고, “법원장을 투표로 뽑는 것 자체로 곤란한 측면이 있고, 장차 재판 지연 요인으로 확실하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 두 가지 모두 김명수 대법원장이 추진한 것이다. 대법관 후보자가 자신을 임명 제청한 대법원장의 핵심 정책을 공개 비판한 건 드문 일이다. 그만큼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의미다.
이는 상당수 판사들도 인정하는 문제다. 차관급 예우가 주어지는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가 사라지니 판사들이 열심히 일할 유인이 사라졌고, 인기투표로 추천된 법원장들이 판사들을 평정(評定)하는 시어머니 역할을 하지 않아 법원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2년 내에 1심 판결이 나오지 않은 장기 미제 사건이 김 대법원장 취임 후 5년간 민사소송은 3배, 형사소송은 2배로 늘어난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어느 부장판사는 “판사들이 왜 열심히 일해야 하는지 의미를 찾지 못하는 심각한 상황”이라고 했다.
정책에 장단점이 있을 수 있다. 법관 관료화를 부추긴다는 지적을 받았던 고법부장 승진제 폐지는 나름의 명분은 있다. 하지만 법원장 후보 추천제는 대체 왜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이 제도는 각급 법원 판사들이 투표로 법원장 후보를 3명 이내로 선정하면 그중 한 명을 대법원장이 임명하는 것이다. 민주적 사법 행정을 위해 대법원장 권한을 분산하겠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그 반대의 부작용만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 법원이 선거판처럼 변질되고 있다. 후보군인 판사가 다른 판사들에게 돌아가면서 밥을 사거나 ‘(나를) 꾸욱 눌러달라’는 내용의 소견문을 전달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면 실력 있는 판사보다 밥 잘 사고 정치 잘하는 판사가 법원장이 될 수 있고, 실제 그런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민주적인 것도 아니다. 올 초 김 대법원장은 추천 투표에서 최다 득표자도 아니었던 판사를 법원장에 임명했다. 김 대법원장과 같은 모임 출신으로 문재인 정권에서 친정권 성향 판결을 했다는 지적을 받은 판사였다. 추천도 안 된 인물을 법원장에 임명한 경우도 있었다. 대법원장의 권한 분산이 아니라 인사 재량만 넓혀준 역설적인 결과다. 과거 법원에선 누가 봐도 될 만한 사람이 법원장이 됐고 그것이 법원 인사의 큰 장점이었는데 이젠 그런 예측 가능성조차 사라졌다.
더 큰 문제는 판사들의 인사 평정권자인 법원장들이 판사들 눈치 보느라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건이 밀려도 신경 쓰지 않고 워라밸에만 관심 두는 판사들이 늘어나고,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판사들은 “그런 문제 법관을 걸러내지 못하는 상황을 보면 힘이 빠진다”고 한다. 이런 악순환의 피해를 국민들이 입고 있다.
그렇다고 고법부장 승진제를 되살리긴 어렵다. 이 제도가 갖는 부정적 측면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법원을 정상화하려면 적어도 그 제도에 담긴 신상필벌의 원칙은 세워야 한다. 그 점에서 이에 방해가 되는 법원장 후보 추천제는 폐지하는 게 맞는다. 그런데 김 대법원장은 얼마 전 ‘법원의 날’ 행사에서 이 제도를 치적인 듯 말했다. 현재 전국 21개 지방법원 중 13곳에서 시행 중인 이 제도를 더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 비판에 귀를 닫고 아집에 빠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