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대전에서 열린 6·13 지방선거 필승결의대회 당시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오른쪽)와 박범계 대전시당 위원장이 국기에 경례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미국 트럼프 행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지낸 윌리엄 바는 논쟁적 인물이다. 트럼프의 충복(忠僕) 중 충복으로 꼽혔던 그는 트럼프 측근의 감형(減刑) 시도에 개입했다가 법무부 전직 관리들로부터 사퇴 요구를 받았다. 장관으로선 치욕이었다. 그랬던 그가 작년 11월 대선 후 트럼프의 대선 불복에 찬물을 끼얹었다. 트럼프 측 요구에 따라 선거 사기 의혹 수사를 지휘했던 그는 언론에 “선거 결과를 바꿀 만한 규모의 사기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바로 경질됐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예스퍼(Yes-per)’로 불릴 정도로 ‘예스맨’이었던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도 작년 6월 연방군을 투입해 인종차별 반대 시위를 강경 진압하려던 트럼프에 반대했다. 일상의 치안 유지에는 연방군을 투입할 수 없다는 법 규정을 들어 버텼다. 그도 대선 이후 경질됐다.

두 사람이 난파선에서 먼저 뛰어내렸다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관료로서 마지막 자존심과 양심을 지킨 측면이 더 크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리 충복이라도 나라의 기강을 흔드는 정권의 폭주에까지 동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문재인 정권에도 ‘해바라기 장관’이 넘쳐난다. 그런데 누구 하나 자존심 지키고 바른 말 하는 이가 없다. 기자가 검찰 간부와 짜고 유시민씨 비리 의혹을 제기하려 했다는 ‘채널A사건’을 두고 추미애 전 법무장관은 “증거가 차고 넘친다”고 했다. 증거가 없는데도 이 의혹을 기정사실화하며 윤석열 검찰총장을 찍어내기 위해 수사 지휘권을 박탈하고 징계 조치를 내렸다. 퇴임하면서까지 그런 일들을 ‘검찰 개혁’이라고 포장했다. 그 뒤를 이은 박범계 법무장관은 “저는 장관 이전에 여당 국회의원”이라며 윤 총장을 쫓아내기 위해 여당이 추진하는 검찰 수사권 폐지 입법에 속도를 내자고 했다. 문 대통령의 속도 조절 주문에도 한술 더 뜨고 나섰다.

이 정권은 전문가들이 부적합 판정을 내린 가덕도에 신공항을 짓겠다며 온갖 편법과 꼼수를 망라한 특별법을 만들어 통과시켰다. 국토부는 이 법에 반대하지 않는 건 공무원으로서 직무유기라는 법률 자문 내용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런데 부산시장 선거 승리를 원하는 문 대통령이 “신공항에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하자 변창흠 국토부 장관은 “송구하다.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관료로서 최소한의 양심마저 버렸다.

한·미 장관들의 이런 차이가 무슨 대수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미 법무장관이 대선 사기의 증거가 없는데도 추 전 장관처럼 “증거가 차고 넘친다”고 했다면 어땠을까. 트럼프와 지지자들의 대선 불복이 더 거세져 의사당 난입 사건 이상의 유혈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 그의 직언이 혼란을 줄이고 나라를 정상으로 돌리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연방군 투입에 반대한 에스퍼의 소신도 마찬가지였다.

문재인 정권은 지금 입법·사법 권력까지 틀어 쥐고 폭주하고 있다. 그나마 머리 꼿꼿이 세우던 윤석열 검찰총장도 사퇴했으니 이젠 걸림돌도 없다. 이 정권의 국무총리는 경제 관료가 나랏빚 걱정을 하자 “개혁 저항 세력”이라 몰아붙였다. 그런 정권과 해바라기 장관들 밑에서 관료들은 무력하기만 하다. 얼마 전 만난 어느 고위 관료는 “숨만 쉬고 있다”고 했다.

브레이크 풀린 이 정권의 폭주는 대선이 다가올수록 더할 것이다. 나라가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다. 미 바이든 행정부의 메릭 갈랜드 법무장관은 인준 청문회에서 “나는 대통령 변호사가 아니라 미국의 변호사”라고 했고, 취임사에선 “공직은 그저 직업이 아니라 소명”이라고 했다. 이 말에 공감하는 양심 있는 관료라면 숨죽이지 말고 눈을 부릅떠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