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만 안 들었지 전쟁터나 다름없는 정치판에서 여성이 살아 남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남자들이 얼마나 무시했으면 임영신 초대 상공부 장관의 취임 일성이 “내 비록 앉아서 오줌을 누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서서 오줌 누는 사람 못지않게 뛰어다녔다. 그런 내게 결재받으러 오기 싫은 사람은 당장 보따리를 싸라”였다. 야당 최초의 여성 당수 박순천도 비슷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비아냥에 “나랏일이 급한데 암탉 수탉 가리지 말고 써야지, 언제 병아리를 길러서 쓰겠느냐”고 받아쳐야 했다. 어지간한 뚝심, 입심, 뱃심이 없으면 뼈도 못 추리고 사라지는 게 한국의 가부장적 정치판. 오죽하면 지은희 전 장관 별명은 ‘지칼’, 박영선 장관은 의원 시절 내내 ‘누구누구 저격수’로 불렸다.
그에 비하면 전재희는 조용한 정치인이었다. 3선 의원에 광명시장, 복지부 장관까지 지냈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른 유명 정치인처럼 센 별명도, 요란한 어록도, 화끈한 무용담도 없다. 그러나 리더십 연구자들 사이에 전재희란 이름은 여성 공직 리더십의 이상적 모델이다. 박통희 전 이화여대 교수는 ‘계획·위임·점검을 통한 합리적 과업지향형 리더’로 전재희를 평했다. 모든 일에 준비가 철저하고 업무를 완벽히 파악해 그의 앞에 서면 부하 직원들은 오금이 저렸다고 한다.
전재희 리더십의 바탕은 도전의 연속이었던 40년 공직 인생, 그리고 가난이었다. 중학 시절부터 가정교사로 뛰며 등록금을 벌었고, 지방대 출신 여성이 자력으로 직업을 얻는 길은 공무원 시험밖에 없다는 판단에 행정고시에 도전, 사상 첫 여성 합격자가 된다. 노동부에서 20년 발로 뛴 게 정치적 자산이 됐다. 구로공단 여공들, 산업체 부설 학교 학생 등 약자들 위한 정책을 만드는 데 열심을 냈다. 장관으로 일할 땐 저출산, 무상보육, 영리의료법인 등 산적한 과제들과 싸우느라 정치적 야망을 세울 틈이 없었단다.
결국 총선에서 정치 신인 이언주에게 패배한 전재희는 정계를 은퇴하며 이런 말을 했다. “천성이 장작불 타듯 해서 하얗게 재가 되도록 일했지만 ‘큰 정치’를 못하고 나온 아쉬움이 있다. 세(勢)를 만드는 정치를 못하고 홀로 떨어져 낙도 정치를 한 게 나의 한계였다.”
그러고 보니 추미애 장관은 전재희가 못한 ‘세(勢)의 정치’로 대권 야망까지 불태우는 ‘큰 정치인’이다. 대찬 천성에 ‘대의’를 위해선 삼보일배도, 호통과 막말도 서슴지 않는 배짱과 투지가 대구 세탁소집 둘째 딸을 5선 의원에 당대표로까지 키워냈을 것이다.
문제는 아쉽게도 실력이었다. 검찰이라는 철벽 엘리트 집단을 개혁하겠다면서 비장의 전략 하나가 없었다. 헌정사상 초유의 검찰총장 징계를 밀어붙이면서 스스로 법리와 절차에 무지하다는 사실만 드러냈다. 설득과 조정이 아닌, 선동과 여론몰이에 기댄 ‘피의 숙청’을 이어가다 그 칼에 자신의 목이 베일 판이다. 일국의 법무장관이 “단독 드리블해서 슛을 날렸는데 자기 편 골대더라”는 저잣거리의 우스개가 됐다.
전재희는 “정치는 오래하는 것보다 바르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게 큰 정치”라고 했다. “여성 공직자로 내가 실수하면 전재희 잘못이 아니라 여성의 잘못이 되니 더욱 치열하게 일했다”고도 했다. ‘파이터’ 추미애는 정반대였다. 야망을 위해서라면 권력의 행동대장 역할도 불사했다. 실패한 남성 리더십의 전형인 패거리 정치, 보복의 정치를 즐겼다. 하필 세(勢)로 삼은 것이 입시 비리 가족을 골고다 언덕의 예수로 추앙하는 집단이다. 그 대가로 ‘추다르크’ 25년 정치 인생이 지금 ‘산산조각 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