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명찰에 적힌 서로의 이름과 얼굴을 번갈아 살폈다. 인사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몸을 기울이기도 했다. 비스듬했던 아침 해는 어느새 머리 위에 있었고, 산새가 가까이에서 날고 있었다. 모임 장소가 가파른 언덕 위 황령산 중턱에 자리한 체육센터였기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과 어울리는 출발지였다.
‘산책(山冊)’은 듣기에도 꽤 흥미로운 기획이었다. 예스24의 손민규 인문 PD가 산과 책을 묶어 이름을 붙이고 사람을 모았다. 부제는 ‘편집자의 숲, 작가의 봉우리, 서점의 길’. 편집자와 서점인과 작가 모두 그 지역 출신으로 꾸리겠다는 포부였고, 첫 지역이 바로 부산이었다.
몇 분이나 오실까, 혹여나 누가 되진 않을까 마음 졸이며 며칠 보냈는데, 매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안도와 함께 더 큰 걱정이 몰려왔다. 비는 오지 않을까, 산이 아닌 서점에서 만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등등. 그러나 모든 게 기우였다. 기획자와 호스트뿐 아니라, 오는 손님들도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게 분명했다. 우리는 봄이 성큼 다가온 일요일 아침, 등산화를 신고 한 손에는 책을 든 채 비장하게 서로를 맞이했다.
손 PD와 나는 몇 주 전부터 영도구 신선동에서 오르는 봉래산과 대신동의 구덕산, 사하구 하단의 승학산, 초읍의 백양산을 후보지로 놓고 있었다. 그러나 황령산보다 적당한 곳은 없어 보였다. 부산진구에서 오르는 황령산 코스라면 교통도 편리하고, 산길이 비교적 평탄하며, 무엇보다도 마지막 코스인 전포동 공구상가에 자리한 크레타 서점까지 가기에 좋았다.
서울에서, 밀양에서, 김해에서, 부산 각지에서 온 우리는 봄기운에 보드라워진 흙을 밟으며 산을 올랐다. 약수터를 지나, 오솔길로 들어서자 산기운이 온몸을 감싸안아 절로 상쾌했다. 어색했던 공기도 잠시, 턱까지 차오르는 숨소리 사이로 친근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모여서 걷기도 하고, 그러다 또 혼자서 산세를 살피다 보니 어느새 정상이었다.
황령산 정상의 묘미는 광안대교 너머로 펼쳐진 드넓은 바다다. 아니, 블록 장난감처럼 쌓여 있는 감만 부두의 컨테이너는 어떤가. 바다 건너 해양대학교가 있는 아치섬은, 부산항 대교로 이어진 영도는, 연제구 시가지와 멀리 금정산까지 한 손에 잡힐 듯한 이 풍광은 부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정상에는 임진왜란 당시에도 쓰였다고 하는 봉수대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우리는 봉수대 전망대에서 각자 준비해 온 도서를 꺼냈다. 책 나눔은 이번 기획의 하이라이트였다. 책을 받게 될 예비 독자에게 전할 편지도 함께였다. 손 PD는 그렇게까지 진지한 마음으로 꾸린 기획이 아니었던 모양인데, 표정을 보아하니 첫 편지부터 마음을 빼앗긴 게 분명했다. 사실 모두가 그랬다. 왜 이 프로그램이 산책(山冊)이어야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해발 427m의 산정에서 책과 함께 모여 앉아 있는지를 정성스레 준비한 편지로 나눈 것이다.
언젠가는 등산과 독서를 하나로 아우르는 산책(山冊)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날지도 모를 노릇이다. 좋은 책 한 권을 다 읽은 후에는 결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듯, 산책 이후에는 분명 무언가 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인생도 함께 누리면 좋듯 산과 책도 마찬가지다. 그러고 보니 오르는 것과 읽어나가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다. 삶이 꼭 그러한 모양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