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돈이 센 것 같지만 돈보다 더 센 것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이야말로 인간의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다. 한자 문화권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고종명(考終命)’이라는 개념을 정립한 바 있다. 편안한 죽음을 뜻한다. 후회도 없고 미련도 없고 ‘잘 놀다 간다’고 생각하며 가는 것이다.

충북 청원의 어느 허름한 암자에 살았던 탄공 스님은 100세가 넘어 돌아가셨다. TV 프로 열린음악회를 소파에 앉아서 보며 박수 치다가 그냥 그대로 돌아가셨다. 고종명이다. 내 지인의 친구는 일행들과 고스톱 치던 중 ‘쓰리고에 피박을 때리다가’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운명했다.

이런 죽음을 개인적 차원의 고종명이라 한다면 사회적 차원의 고종명이 있다. 폭격으로 죽은 이란 최고 지도자 하메네이의 죽음이 그것에 해당되지 않나 싶다. 콘크리트 블록에 깔려 죽은 그의 얼굴 표정 사진을 보니까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게까지 비참한 죽음을 당한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원수의 죽음이니까 잘 죽었다라고 생각하겠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왠지 죽음의 미학이 느껴진다.

하메네이는 죽을 복도 타고난 팔자였다. 1939년생이니까 나이도 87세다. 아쉬운 나이가 아니다. 전립선암도 있었다고 한다. 1989년부터 최고 권좌에 앉아 37년간 칼자루를 휘둘렀으니 원도 한도 없이 대장놀이는 충족한 셈이다. 전립선암으로 소변도 잘 못 누고 시달리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데모 진압하면서 이란 국민을 3만명 정도 죽였다는 원망을 막 듣기 시작하던 시점에 죽어 버렸다. 죽지 않고 마두로처럼 생포되었더라면 온갖 망신 다 당했을 것이다. 아니면 러시아나 중국으로 돈다발 챙겨서 망명하는 모습을 보여줬을 수도 있다. 이런 추한 모습도 보여주지 않고 지하 벙커 자기 처소에서 죽었으니 순교가 된 셈이다. 미국의 폭격이 하메네이의 죽음을 장엄한 순교(殉敎)로 격상시켜 줬다. 그 순교가 개인의 죽음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란 국민을 똘똘 뭉치게 하여 전의에 불타게 만드는 후폭풍 효과, 즉 사회적 고종명을 하게 한 셈이다.

몇 년 전 안국선원(安國禪院)의 신도회장 보살님이 해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내가 언제 죽을지는 대충 짐작이 가요. 다만 내 죽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물질 세계가 전부가 아니고 정신 세계도 있다’는 신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되었으면 하고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