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선, 엄흥도· 청령포·노산군, 1986~1990년, 캔버스에 유채, 85x70cm

빠른 물살에 속절없이 떠내려가는 이가 있다.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고작 열여섯 나이에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은 단종이다. 흰 옷소매 아래로 손이 나와 있으나 얼굴은 물속으로 가라앉아 보이지 않는다. 종잇장처럼 가볍게 흩어지는 여린 왕의 시신을 붙잡으려 거침없이 헤엄치는 남자가 있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 삼족을 멸한다는 세조의 엄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강물에 뛰어든 영월의 호장 엄흥도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천만 관객을 울리기 전부터, 화가 서용선(1951년생)은 이처럼 단종 그림에 천착해 왔다.

서용선은 1986년 청령포를 처음 방문해 거기가 바로 단종의 유배지였음을 알게 됐다. 험한 산을 뒤에 두고 삼면이 강물로 둘러싸여 지금도 쉽게 드나들 수 없는 청령포를 두고 서용선은 “어떻게 인간이 이런 자연을 찾아내어 사람을 보낼 생각을 했는지 놀랐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화가는 강물에 시신이 떠내려가는 환영을 보는 강렬한 경험을 하게 된다. 당시 그 또한 여러 괴로움을 겪고 있어서 그랬을까. 기막힌 풍경 앞에서 역사 속 비극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던 걸까. 아니면 죽어서 태백산으로 올라가 산신령이 되었다는 단종의 혼령이 보여준 것일까. 영문을 알 수야 없지만, 어쨌든 서용선은 그 뒤로 수십 년간 계유정난을 비롯하여 단종을 둘러싼 여러 사건과 인물을 치밀하게 조사하고 관련 장소를 답사하면서 수많은 그림을 그려왔다.

혹자는 이를 ‘역사화’라고도 하지만, 단종은 오히려 역사에서 애써 지워졌던 인물이다. 서용선의 단종 그림은 그보다는 권력에 대한 욕망과 그로 인해 생겨나는 슬픔을 화가의 내면을 통해 형상화한 결과물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