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금의 용도는 정권마다 바뀌었다. 문재인 정권은 “새만금에 세계 최대 태양광 단지를 건설하겠다”고 했다. 사진=연합뉴스

1987년, 만경평야와 김제평야를 잇는 새로운 땅이라는 뜻을 가진 ‘새만금 간척 종합 개발’이 시작됐다. 부안과 군산을 연결하는 세계 최장 33.9㎞ 방조제가 완공되며 서울 면적의 3분의 2에 달하는 거대한 땅이 생겨났다. 지역민들의 기대는 부풀었지만, 정작 이 너른 땅을 무엇으로 채울지가 문제였다. 공업 지대는 기반 시설이 부족했고, 리조트는 볼거리가 마땅치 않아 기업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

수많은 정치인이 실현 가능성 없는 공약을 남발하던 중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2016년 LG가 새만금 23만 평에 3800억원을 투자해 스마트팜 연구·개발 단지를 짓기로 한 것이다. 계열사 CNS의 온실제어·재배정보수집, 이노텍의 환경센서·CCTV, 전자의 인공양분공급·지열냉난방기술 등 그룹의 IT 역량을 총집결해 스마트팜 기기를 생산하려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발표 3개월 만에 무산됐다. 농민 단체와 지역 정치권이 ‘재벌의 농업 진출’이라며 결사반대했기 때문이다. 생산한 농산물을 전량 수출하겠다는 파격적 제안도 소용없었다.

일러스트=이철원

스마트팜이 좌절되자 정치권은 카지노를 포함한 복합관광타운을 대안으로 내세웠지만 투자 기업이 없어 무산됐다. 다음 선택지는 새만금 잼버리 대회였다. 시원한 무주 태권도원이라는 대안이 있었음에도, 새만금을 어떻게든 채워야 했던 지역 정치인들의 욕심이 화를 불렀다. 결과는 참담했다. 유명 예능 프로에서 “말 안 들으면 잼버리 보낸다”는 대사가 나올 정도로 새만금은 국민적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대회가 끝나고 1년이 지나서야 완공된 글로벌청소년리더센터는 실패의 상징으로 남았다.

이제는 한이 맺힌 것일까. 최근 지역 정치권은 용인에 조성 중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새만금으로 옮기자는 황당한 주장을 펴고 있다. 심지어 이를 “내란을 끝내는 일”이라는 궤변으로 포장한다. 추진하는 일마다 실패하더니, 타 지역이 공들여 키운 산업을 통째로 가져오겠다는 ‘도둑놈 심보’에 부끄러움은 고스란히 전라도민의 몫이 됐다.

더불어민주당 안호영(완주·진안·무주) 의원은 용인에 있는 삼성반도체 클러스터를 새만금으로 이전하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사진=뉴시스

LG 스마트팜이 무산된 사이, 우리 농업의 위기는 더욱 깊어졌다. 농업인의 고령화와 낮은 생산성으로 인해 2023년 한국의 식료품 및 비주류 음료 가격은 OECD 회원국 평균의 1.5배를 기록했다. ‘농민의 가면’을 쓰고 보수 정권 퇴진과 반미 시위 등 정치 활동에 앞장서 온 농민 단체들이 변화를 가로막는 사이, 농가 소득 중 정부 지원금 비율은 36%까지 치솟았다. 나랏돈 없이는 생활이 힘든 수준에 이른 것이다.

뒤늦게 지자체들이 스마트팜 조성에 나서고 있지만, 한계는 명확하다. 김제 스마트팜 혁신밸리처럼 소규모 예산으로 청년농을 교육해 창농을 유도하는 방식으로는 거대한 농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단기 교육과 영세한 규모의 창농으로는 상업적 규모의 농업에 안착하기 어렵고, 부채 부담으로 파산하는 사례도 보고된다.

유럽 등 선진국은 청년농을 곧바로 창업가로 만들기보다 기업 주도의 영농 현장에서 최소 10년 이상 취업 경험을 쌓게 한다. 적성과 능력을 고려해 일부만이 민간 투자로 창업한다. 스마트팜 역시 단계가 있다. 단순 수동시설원예 수준에서 출발해, 이송·수확·포장까지 AI로 자동화하는 고도 단계에 이르러야 경쟁력이 생긴다. 이는 대기업의 자본과 기술 없이는 어렵다.

세계 식량 시장은 ADM, 카길 등 글로벌 대기업들이 지배하고 있다. 이들은 자사 인공위성까지 띄워 작황을 관리하는 첨단 과학 전쟁을 벌인다. 종자 시장 역시 상위 10개 기업이 70% 이상을 점유한다. 대기업 주도의 스마트팜은 단순한 농가 소득 증대를 넘어, 전쟁이 끝나지 않은 대한민국 같은 나라엔 생존을 위한 필수 전략이다.

새만금은 이런 미래 농업을 펼치기에 너무나 매력적인 공간이다. 국유지로 권리 관계가 명확하고, 평탄한 미개발지가 4만 헥타르에 이르는 광대한 땅은 단언컨대 새만금뿐이다. 무엇보다 이곳은 기업이 먼저 손을 내밀었던 땅이다. 기업의 투자는 정치 논리와 다르다. 철저한 수지타산을 따져 수천억 원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경제성장은 결국 기업이 만든다. 지금처럼 정부 주도 사업에만 매달린다면 효율은 떨어지고 재정 부담만 커질 뿐이다. 호반·중흥처럼 떠나는 기업을 못 잡았다면 복합쇼핑몰·스마트팜 투자처럼 오겠다는 기업은 환영해야 하는 것 아닌가? 늦기 전에 대기업 주도 스마트팜을 다시 추진하자. 성공한다면, 거제가 조선 산업의 상징이 되었듯 새만금은 한국 농업 대전환의 상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