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은 월드컵의 해다. 국제축구연맹(FIFA)에 따르면 2022 카타르 월드컵은 전 세계에서 50억명 이상이 시청했다. 스포츠를 넘어선 인류 최대의 단일 행사다. 아르센 벵거는 “월드컵은 축구가 국가의 언어가 되는 순간”이라고 말했다. 클럽 축구가 자본과 시장의 논리로 작동한다면, 월드컵은 정체성과 공동체의 서사다. 한 국가가 어떤 철학과 태도로 세계와 마주하는지를 보여주는 무대다.
이번 대회는 특히 미국·캐나다·멕시코 3국 공동 개최, 48개 참가국, 대륙을 넘나드는 이동 거리와 시차, 다양한 기후 조건까지 더해지며 전례 없는 규모와 체계로 열린다. 철저한 준비와 실력 없이는 요행을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다. 세계 랭킹 22위인 우리 대표팀에 32강은 당위이고, 16강 진출은 성과다. 나아가 성적을 넘어, ‘어떤 팀으로 서느냐’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이 사명을 짊어진 인물이 클린스만 체제 이후 어수선해진 대표팀을 논란 속에서 맡은 홍명보 감독이다.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감독은 단순한 기술 책임자가 아니라 공적 조직의 리더다. 이 자리에 요구되는 과제는 네 가지 층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세계 축구의 흐름을 읽고 이를 ‘우리만의 해법’으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현대 축구의 전술 주기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변한다. 압박 형태와 빌드업 구조는 매 시즌 재정의된다. 중요한 것은 그 흐름을 우리에게 맞게 재해석하는 일이다. 감독은 손흥민, 이강인, 김민재로 대표되는 황금 세대의 역량을 극대화할 ‘한국형 전술 모델’을 설계해야 한다.
둘째, 확고한 철학과 방향성의 정립이다. 우리는 어떤 축구를 하겠다는 것인가. 주도할 것인가, 실리를 택할 것인가.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 안정을 우선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선명해야 전략은 흔들리지 않고, 전술은 일관성을 갖는다.
셋째, 전략과 전술을 선수들에게 이해시키는 과정이다. 대표팀은 훈련 시간이 제한적이고, 선수들은 각기 다른 리그 환경에서 모인다. 그래서 감독은 지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설득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왜 지금 이 선택을 하는가”를 선수들이 납득하고 받아들일 때, 전술은 비로소 살아 움직인다.
넷째, 문화와 규범을 정립해 ‘단단한 팀’을 만드는 일이다. 어떤 태도가 요구되고, 어떤 행동이 결코 용인되지 않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개성 강한 스타 선수들을 하나로 묶는 힘은 감독이 설계한 문화에서 나온다. 지난 아시안컵의 아픈 기억은 규범이 무너진 조직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보여준 반면교사였다.
6월 본선을 앞둔 시점에서 이 네 가지는 이미 완성형으로 갖추어져 있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 과정이 팬과 국민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현재 대표팀을 둘러싼 불안과 불신의 핵심이다. 준비된 철학은 있는지, 지금의 기복이 계획된 실험인지, 아니면 표류의 신호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정보의 공백은 언제나 불안을 낳고, 그 공백은 억측과 비난으로 채워진다.
이 불안은 이미 경기장에서 표현됐다. 최근 열린 A매치에서,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빈 좌석들이 눈에 띄었다. 한때 티켓을 구하지 못해 아우성이던 국가대표팀 경기장이 조용해졌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국민들이 동참하여 ‘대한민국’을 함께 외치고 울고 웃는 소중한 시간이 손상되고 있다.
팬덤은 ‘잘해서 좋아하는 관계’가 아니다. 관계 그 자체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신곡이 기대에 못 미쳐도 앨범을 사고, 성적이 부진해도 경기장을 찾는 것이 오늘날의 팬덤이다. 반대로, 설명받지 못하고 방향을 공유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순간, 팬들은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빈 경기장은 단순한 경기력에 대한 실망이 아니라, 관계가 느슨해지고 있다는 경고다. 그러나 아직 팬들과 함께할 기회는 남아 있다. 해결책은 ‘경기 결과로 보답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마음을 여는 소통과 공유다. 설명되지 않은 과정은 신뢰를 만들지 못하고, 관계는 결과만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반면 공유된 과정은 참여를 부르고, 집단적 에너지를 만든다.
이제는 침묵을 깨야 할 시간이다. 소통은 팬과 국민을 월드컵이라는 여정에 ‘탑승’시키는 전략적 행위다. 거스 히딩크가 높은 눈높이의 비전을 제시하며 새로운 훈련 방법론을 도입했고, 파울루 벤투가 롱볼을 버리고 빌드업 축구의 당위성을 일관되게 설명했을 때, 국민은 결과 이전에 과정에 동의했다. 그들은 팬들을 구경꾼이 아니라, 같은 배를 탄 동반자로 만들었다.
화법이 투박하다는 이유는 변명이 될 수 없다. 정례 브리핑이든, 데이터에 기반한 설명이든, 협회의 시스템이나 제3의 메신저를 활용해서라도 메시지는 전달되어야 한다. 그것이 팬과 국민이 기대를 갖고 동참하고, 선수들에게도 “우리는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길이다.
또한 대표팀과 감독의 의무는 월드컵 성적에서 끝나지 않는다. 준비 과정 자체가 대한민국 축구 전체를 위한 공적 자산이 되어야 한다. 세계적 트렌드를 분석하고, 이를 재해석하며 축적한 철학과 전술, 경험은 각급 리그와 유소년 시스템으로 흘러가야 한다. 월드컵이 끝난 뒤 남는 것이 경기 결과뿐이라면, 그것은 실패에 가깝다. 반대로 그 과정에서 정리된 데이터와 경험이 다음 세대를 위한 토대가 된다면, 그 월드컵은 성공이다. 그래서 과정의 공유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다.
리더십의 본질은 자신이 품은 비전과 지금 흘리는 땀의 의미를 구성원에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데 있다. 방향을 공유하지 않는 목표는 동력을 만들지 못하고, 공감 없는 성과는 오래가지 않는다. 결과는 통제할 수 없지만, 과정을 공유해 신뢰를 얻는 것은 전적으로 리더의 선택과 진정성 있는 노력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