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K’를 소비한다. BTS가 공연을 열면 도시 경제가 출렁이고, ‘오징어 게임’은 한 달 만에 1억4000만 가구를 사로잡았다. 뉴욕 시민은 던킨도너츠 대신 김밥을 찾고, 파리의 마트에서는 한국 소스와 과자가 매대를 채운다. 한 해 K콘텐츠 수출액은 160억달러에 달하고, 넷플릭스의 K콘텐츠 투자액은 누적 4조원이 넘는다. K컬처는 유행을 넘어 IP·팬덤·플랫폼이 결합된 미래 산업으로 성장했다.
반면 K스포츠는 이 흐름에 뒤처졌다. 세계적 선수도 배출하고 올림픽·월드컵도 개최하며 세계 중심에 선 듯하나 산업 경쟁력 관점에서 보면 착시다. 우리는 설계자보다 참여자에 가깝다. IOC와 FIFA는 중계권·상업 패키지로 수조 원의 수익을 올린다. 우리는 그들이 설계한 판에 돈을 대고, 선수로 뛰고, 대회 유치를 대가로 거액을 지출한다. 흥행은 우리가 책임지지만, 성과는 그들이 가져간다.
WBC는 MLB가 운영하는 수익 사업이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이 대회에 참여하고 중계권과 티켓 구매, 스폰서를 해주지 않으면 애당초 성립이 안 된다. 일본은 불참을 불사하며 상업적 권리 확보를 시도했다. 이에 더해 일본은 주도적으로 프리미어12라는 대항마를 창설했다. 한국 야구는 좋은 대회 성적 이상의 욕심이 없어 보인다.
LPGA 역시 한국의 스폰서십과 중계권료, 그리고 우리 선수의 활약이 없으면 존립이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LPGA의 지배 구조, 수익 권한에 어떠한 영향력도 없다. 손흥민이 프리미어리그(PL)에서 활약하며 고액 연봉을 받았지만, 그들이 한국에서 벌어간 수익은 비교가 안 되게 크다. 놀랍게도 국내 4대 프로 리그의 중계권료 총합이 PL 한 개 구단의 연간 중계권 수익보다 작다.
K컬처는 일찍이 산업화의 길을 택했다. 삼성영상사업단, 오리온 등 대기업과 일신창업투자 등 선도적 자본 투자자들이 민간 주도 시장 논리에 따라 산업 구조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창작, 제작, IP, 유통, 팬덤 확장으로 이어지는 완결형 산업 밸류체인을 구축했다.
K스포츠는 산업이 아니라 지원 중심 구조에서 태동하고 자라났다. 대기업 자본은 투자보다 후원,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성격이 강했다. 이 차이가 한국 스포츠의 성장 방식을 결정했다. 한쪽은 산업의 근육을 만들었고, 다른 한쪽은 보호막만 두껍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한국 스포츠는 네 가지 구조적 한계에 갇혔다.
첫째, 행정 중심 거버넌스다. 의사 결정의 기준이 시장 논리가 아니라 행정, 정치 논리에 좌우된다. 대기업과 중앙정부, 지자체의 지원이 생존을 보장하니, 운영자들의 시선은 시장보다는 예산 배정에 가 있다.
둘째, 지나친 경기 성적 중심 KPI(핵심 성과 지표)다. 성적은 선수와 감독의 당연한 목표다. 리그·구단·협회 리더들의 목표는 산업 자산 축적과 생태계 성장을 지향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운동장과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의 목표가 단기 경기 성적에만 매몰된 경우가 많다. 성적은 1년의 시간이고, 산업은 10년의 시간이다.
셋째, 안정의 역설이다. 코로나 시기 유럽 축구팀이 다수 파산했다. 국내의 경우 무관중 상황에서도 한 군데도 문 닫지 않았다. 유럽의 축구 산업 리더들이 매년 안정된 예산을 받는 우리 프로 구단의 특이한 구조를 접하면, 20년짜리 프로젝트를 할 수 있겠다고 부러워한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 구단들의 호흡은 대개 3년을 넘지 않는다. 온실에 꽃은 피지만 숲이 자랄 수는 없다.
넷째, 열악한 수익 구조다. 수익 구조가 입장권·스폰서·중계권에 국한된다. 더 큰 문제는 이들조차 시장가격이 아니라 관계, 지원 논리에 따라 결정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IP·디지털·데이터·관광·교육·라이프스타일·2차 콘텐츠 등 경기장 밖 파생 수익 모델은 여전히 태동기다.
눈높이 변화가 절실하다. 시즌 승리를 넘어 산업 설계를 지향해야 한다. 의사결정 구조를 행정적 언어에서 시장 논리로, 리더십 KPI를 경기 성적에서 산업 성과로, 안정적 지원 구조에서 투자형 자본 전제 성과 기반 경쟁 구조로 바꿔야 한다. 티켓·스폰서·중계권이라는 3대 수익의 시장 친화적 발전과 경기장 밖 가치의 파생, 확장을 통한 산업화도 필수다.
최근 스포츠산업 성장의 핵심 요인이 AI·빅데이터 등 기술 발전과 더불어 빠르게 바뀌고 있다. MLB는 ‘스탯캐스트’로 초당 수백 프레임의 경기 데이터를 분석하고, PL 구단은 AI 기반 팬 행동 예측 모델로 티켓 가격과 MD 수요를 실시간 조정한다. NBA는 글로벌 팬 데이터로 디지털 매출을 폭발적으로 키우고 있다. 경기장 안 퍼포먼스보다 경기장 밖 데이터, 2차 콘텐츠, 게임화, OTT, 팬 데이터, 디지털 경험이 더 큰 산업 가치를 만든다. 스포츠는 이제 경기 결과 이상으로 확장 가능한 IP와 기술이 승부를 가르는 산업이 됐다.
여기에 K스포츠의 기회 요인이 있다. AI 인프라, OTT 경험, 게임·IT 산업, 디지털 수용성, 그리고 K컬처로 쌓은 콘텐츠 비즈니스 역량은 이미 세계 최상위권이다. 우리가 PL이나 MLB가 100년 이상 쌓아온 스토리를 단기간에 따라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데이터와 AI 기반 스포츠 산업에서는 경쟁력이 있다.
K컬처가 세계적 선도 산업이 되기까지 20~30년 걸렸다. K스포츠는 지금 그 출발선에 섰다. 이제 우리는 남이 펼친 무대에서 잘하는 수준을 넘어 주체적으로 판을 짜는 역할에 도전해야 한다. K스포츠를 대한민국의 다음 미래 산업으로 만들 선택을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