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콥스키. /위키피디아

1893년 11월 6일 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다. 오늘 차이콥스키가 53세로 사망했다. 자신의 교향곡 제6번 ‘비창(Pathétique)’의 초연 지휘를 직접 한 지 9일 만이다. 마지막 작품이 최고의 작품이었으니, 예술가로서는 다행(?)인지도 모른다.

다만, 모차르트의 죽음에 독살설이 있다면, 차이콥스키의 죽음에는 강요된 극단적 선택설이 있다. 한 가지 문제가 인생 전체의 어둠이 되는 경우가 있다. 차이콥스키에게 그것은 ‘동성애’였다. 러시아 정교회의 종교 윤리 도그마가 지배하는 19세기 러시아였다. 동성애자 정체성은 최악의 죄악이자 약점 잡히기 좋은 건수였다. 이것이 우울증으로 가려져 있을 적에, 그 슬픔은 그의 아름다운 음악으로 승화됐다. 만약 당신이 아름다운 선율을 듣고 있다면, 그건 ‘거의 다’ 슬픈 선율일 것이다. 아름다움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에서 나온다. 슬픈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반면, 이 동성애 문제가 드러났을 때는 그의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이라든가 심지어는 죽음에 대한 결정적 의혹이 되고 만다. 차이콥스키가 끓이지 않은 물을 마셔 콜레라로 죽었다는 공식적인 발표는, 그런 물을 마실 이유도 없었고, 당시로서는 불치의 전염병인 콜레라로 죽은 그의 시신을 지인들과 6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조문했다는 것에서부터 허점이 많다. 하여 사실은, 그 시대 실권자 인척과의 동성애 관계가 드러나, 법적 처벌 대신 콜레라와 증상이 비슷한 비소(Arsenic) 음독을 선택하게 됐다는 것.

서양 클래식 음악처럼 인기와 위상이 영구적으로 시들지 않는 예술 분야가 있을까 싶다. 러시아가 서유럽 문명에 속하는지, 유라시아 문명 정도로 봐야 하는지에 있어서, 나는 러시아의 문명적 핵심이 전자에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 서양 클래식 음악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화성악과 수학으로까지 근거가 이어진다. 차이콥스키는 동시대 러시아 국민주의파에게서 비러시아적이라고 비판받았다. 하지만 서유럽인들에게는 충분히 러시아적이었다. 그게 그의 음악적 대중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