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미국에서 열린 유럽과 미국 간 골프 대항전 라이더컵. 미국은 홈 관중 앞에서 유럽에 15-13으로 패배했다. 승패보다 경기장 안팎의 풍경이 충격적이었다. 관중은 유럽 선수 로리 매킬로이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그 가족에게 모욕을 가했다. 에어포스원을 타고 골프장 위를 저공 비행하며 등장한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적 존재감을 과시했다. 명예의 무대에서 미국 선수들은 상금 지급을 요구했고, 지도부는 무력하게 이를 방조했다. 뉴욕타임스는 “세계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미국은 스포츠의 예의를 잃었다”고 평했고, 골프 다이제스트는 “라이더컵이 아니라 트럼프 랠리였다”고 꼬집었다.
국제 스포츠 이벤트는 국가, 특히 주최국이 세계에 메시지를 던지는 플랫폼이며, 그 사회의 가치와 리더십을 증명하는 자리다. 이 무대에서 미국은 오랫동안 선도국의 품격을 보였다. 그러나 오늘날 그 모습이 흔들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새로운 세계 질서를 설계한 주체였다. 유엔·IMF·세계은행·GATT·WTO로 이어지는 제도를 중심으로 시장경제·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세계에 확산했다. 국제정치학자 존 아이켄베리는 이를 ‘자유주의 국제질서’라 정의한다. 그는 미국이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에 입각해 다양성·개방성·제도화로 만든 다자주의 질서를 국제사회가 자발적으로 수용하게 했다고 설명한다.
미국의 리더십은 군사력·경제적 패권만이 아니라, 가치·규범 기반 비전에서 출발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1년 ‘4대 자유’ 연설에서 “우리가 지키려는 미래의 세상은 언론과 신앙의 자유, 결핍과 공포로부터의 자유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했다. 이는 집합적 노력에 의한 평화와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전후 세계 질서의 도덕적 기초가 됐다. 그리고 스포츠 무대는 이 메시지를 세계와 소통하는 매개였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그 상징적 출발점이었다. 소련의 보이콧 속에서도 미국은 창의적 기획과 민간 중심 자본 조달로 대회를 성공시켰다. 정부 보조금 없이 흑자를 낸 첫 올림픽으로, 자유 시장 경제의 효율성을 증명했다. 하늘을 나는 제트팩맨·디지털 중계·기업 후원 중심 운영은 모두 자유와 창의라는 미국적 가치를 상징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은 문화적 개방성의 상징이었다. 축구가 비주류인 미국에서 역대 최다 관중을 기록하며 다민족·다문화 국가의 진면목을 보였다. 이민자의 나라로서 인종·언어·문화 차이를 포용과 공존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세계에 던졌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은 글로벌 기업과 지역 공동체의 협력을 통해 분권적 민주주의를 구현했다. 중앙정부가 아니라 지역·민간이 주체인 미국식 민주주의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1999년 여자 월드컵에서 브랜디 채스테인이 결승전 승부차기 후 유니폼을 벗고 포효하던 장면은 승리를 넘어 여성 자율성과 표현의 자유를 상징했다. 미국 리더십은 남성 중심 힘의 서사에 머물지 않고 다양성과 평등으로 확장됐다. 9·11 테러 직후인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성조기가 입장하자 세계 관중이 기립했다. 미국은 상처 속에서도 품격을 보이며 민주주의의 회복 탄력성을 증명했다.
이처럼 미국은 국제 스포츠 이벤트로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의 개방성·다양성·인권 존중 철학을 세계에 전했다. 미국은 스포츠를 통해 세계에 공존의 규칙과 질서를 제시했고, 그것은 전후 국제사회에서 미국 리더십의 본질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여름에 열린 FIFA 클럽월드컵에서 미국 이민 당국은 입국과 체류 조건을 까다롭게 단속했다. 많은 팬이 비자 문제로 입국을 거부당했고, 강화된 보안 조치는 환영과 포용의 메시지를 가려버렸다. 과거 미국이 보여주었던 개방과 포용의 리더십보다는 통제와 배타성의 이미지만이 남았다.
2026 북중미 월드컵을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불안을 더욱 키우고 있다. 그는 일부 도시를 “위험한 도시”라고 지칭하며 개최 도시 변경 가능성을 언급하여 국내 정치 갈등에 스포츠를 끌어들였다. 공동 개최국인 멕시코와 캐나다와의 무역 갈등을 두고 “대회가 더 흥미로워질 것”이라고 말한 발언은 스포츠를 국제 정치의 흥정판으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을 불렀다.
트럼프 시대의 미국은 ‘아메리카 퍼스트’ 구호 아래 배타주의를 강화했다. 일방적 관세 인상과 규제를 앞세운 보호무역주의, 국제 협약 탈퇴로 드러난 탈다자주의는 모두 미국이 자유주의 질서에서 이탈했음을 보여준다. 국제정치학자 뉴먼과 패럴이 제시한 ‘무기화된 상호의존성’이라는 개념처럼, 미국은 공존공영을 위해 설계되었던 경제적 상호 의존을 이제 전략적 무기로 바꾸고 있다. 아이켄베리는 “미국은 규범과 제도를 제공하던 리더에서 규범을 거부하는 존재로 변모했다”고 분석한다.
국제 스포츠 행사는 인류가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규칙 안에서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자리다. 동시에 주최국이 어떤 리더십과 품격을 보여줄 수 있는지 세계가 평가하는 시험대이다. FIFA와 IOC는 스포츠의 탈정치를 강조하지만, 현실의 스포츠는 언제나 사회와 정치의 거울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얻는 것은 규칙을 지키며 공정하게 싸우고, 승복과 존중을 통해 공존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미국은 과거 국제 스포츠 행사를 통해 세계에 그런 비전을 심어준 선도 국가였다. 그러나 트럼프 시대에 국제 스포츠 주최국으로서 미국은 규칙을 제공하고 준수하는 리더의 모습이 아니다. 2026 북중미 월드컵은 미국이 평화 공존과 공동 번영의 가치를 대표할 수 있는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리더로서 품격을 증명할 수 있을지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