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되는 예루살렘 - 빈 미술사 박물관에 소장된 17세기 프랑스 화가 푸생의 1638년 작 ‘티투스의 예루살렘 파괴’. 1차 유대 로마 전쟁 때인 서기 70년 로마의 총사령관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파괴하는 장면이 담겼다. 당시 로마군은 예루살렘을 함락한 뒤 살육과 약탈을 했다. 성전 수장고에 숨어 있던 여자와 어린이 6000명은 산 채로 불태워졌다. 당시 가나안에 살던 유대인 240만명 중 절반 가까운 110만명이 살육당하거나 굶어 죽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헤롯 시대에 가나안 지역 유대인 수는 약 240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그 무렵 로마제국 전역에서 조사된 유대인 수는 694만4000명이었다. 이 수치는 서기 48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실시한 인구조사에 근거한 것이다. 유대인은 로마제국 인구의 10%가 넘는 큰 민족이었다.

1차 유대 로마 전쟁

서기 66년 여름 예루살렘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로마 총독이 유대인들을 십자가에 처형하고, 체납된 속주세를 받으려 예루살렘 성전에 쳐들어가 17탈렌트(화폐단위)의 금화를 몰수한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몰수 금액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신성한 성전을 더럽힌 행위에 분노하여 유대인들이 들고일어났다. 폭동은 대규모 반란으로 발전했다. 유일신 신앙을 지키려는 신앙적 가치의 충돌이 원인이었다. 예루살렘에서 로마 병사들이 참살당한 다음, 시리아 주재 로마군이 도착했으나 유대인의 거센 저항에 놀라 퇴각한 것이 결과적으로 패주로 이어지고 만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갈릴리 전 지역을 손에 넣었다.

1년에 딱 하루만 예루살렘 출입 허용

당시 로마 황제는 네로였다. 예루살렘에서 로마군이 전멸당하자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로마는 4개 군단을 투입하고 당대 최고 명장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장군은 서두르지 않았다. 먼저 해안 지대를 제압하고 예리고를 탈환한 다음 남쪽 쿰란 수도원을 파괴했다. 그리고 지방을 먼저 평정해 예루살렘을 고립무원의 상태로 만들었다.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이 전쟁 중인 69년 로마 황제로 추대되어, 그는 아들 티투스(디도)를 후임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로마로 떠났다.

로마 콜로세움을 건설한 사람들은 1차 유대 로마 전쟁 당시 로마군에 끌려간 유대인 노예들이다. /위키피디아

이듬해 봄 티투스는 예루살렘 탈환을 개시했다. 유대 병력 2만3000명에 비해 8만명이 넘는 로마의 월등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전쟁 양상은 치열했다. 티투스는 부하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하지 말라고 했으나 전쟁 중 방화로 소실되었다. 함락된 예루살렘 성안에서는 무차별 살육과 약탈이 자행되었다. 성전 수장고에 숨어 있던 여자와 어린이 6000명은 산 채로 불태워졌다. 전쟁의 참상은 처절했다. 가나안에 살던 유대인 240만명 가운데 절반 가까운 110만명이 살육당하거나 굶어 죽었다. 이때 다른 종파는 모두 전멸당하고 바리새파만 살아남았다. 이 통에 사제 계급이 없어져 유대교는 평신도 종교가 되었다.

그들은 포로들을 로마로 끌고 가서 장대한 개선 행렬을 벌였다. 전쟁 승리를 기념하는 화폐까지 주조했을 뿐 아니라 로마 역사상 최초로 개선문을 세웠다. 당시 잡혀간 유대인 노예들이 건설한 게 콜로세움이다. 오늘날 콜로세움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전쟁이 끝난 뒤 로마제국은 승자의 관용을 베풀어 유대인들이 그들 땅에서 살며 유대교를 믿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마사다 전투

예루살렘 점령으로 전쟁은 일단락되었으나 유대인의 봉기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열심당원’들은 유대 사막 동쪽 절벽 위 요새 마사다에서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포함해 960명이 로마제국에 대항했다. 이미 2년 전에 ‘유대 정복기념 주화’까지 만들어 쓰던 로마제국으로서는 이들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는 10군단에 마사다를 함락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72년 10군단이 마사다로 진군해 왔다. 로마군 9000명과 노역에 동원된 유대인 포로 6000명 등 1만5000명이었다.

그러나 마사다의 유대인들은 놀랍게도 10군단과 맞서 2년이나 버틴다. 마사다에 저장된 엄청난 양의 식량과 물, 무기는 그들의 마지막 버팀목이었다. 마사다를 포위한 로마군은 벼랑 위에서 내려다보며 활을 쏘아대는 반란군을 쉽게 이길 수 없었다.

마사다의 서쪽 벼랑에는 넓은 바위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10군단 실바 장군은 이곳에 인공 능선을 쌓아 올리도록 지시했다. 6000명의 유대인 노예들이 공사를 맡았다. 마사다의 열심당원들은 차마 동족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없었다. 비탈길이 완성되자 투석기에서 날아간 돌들과 불화살은 마사다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들은 다음 날 아침 구름다리를 놓고 성안으로 쳐들어가기로 했다.

마사다 요새 - 제1차 유대 로마 전쟁에서 유대인들이 최후의 항전을 펼친 마사다 요새 전경. 예루살렘 점령 이후에도 로마에 굴복하지 않은 960명의 유대인은 천혜의 절벽 요새 마사다에서 1만5000명의 로마군에 맞서 2년이나 버텼다. /대니 스턴펠드(Dany Sternfeld), 플리커(Flickr)

그날 밤 유대인 지도자 ‘엘리에제르 벤 야이르’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고 남자들을 모아놓고 “자유란 이름으로 수의를 입자”며 자결을 유도하는 연설을 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로마와 맞서 싸운 마지막 용사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산 채로 로마군에 잡히면 노예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명예롭게 자유인으로 죽을 수 있으며, 이 특권을 주신 분은 여호와이십니다. 우리의 아내들이 욕을 당하지 않은 채 죽게 하고, 우리의 자녀들이 노예의 기억 없이 세상을 떠나게 합시다. 먼저 우리의 재물과 요새를 불태웁시다. 그러나 우리의 곡식 창고만은 남겨둡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결한 것은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결의한 바와 같이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열망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토록 합시다. 산 채로 잡힌 청년들이 계속되는 고문에 고통받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남편은 거칠게 다루어지는 자신의 아내를 볼 것입니다. 그는 또 두 손이 묶여서 ‘아빠’ 하고 소리치는 어린 자식들의 목소리를 들을지도 모릅니다. 자! 우리의 손이 자유롭게 칼을 들 수 있을 때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과 함께 자유인의 몸으로 세상을 하직합시다.” “지금까지 우리는 하느님 외에 그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들 손에 죽거나 아니면 항복하여 노예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여 자유인의 몸으로 세상을 떠납시다!”

엘리에제르 벤 야이르의 말이 여기에 이르자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결연한 의지가 감돌았다. 남자들은 경건한 얼굴로 흩어져 집으로 돌아간 후 아내와 아이들을 부드럽게 껴안고 눈물이 그득한 채 오래도록 입을 맞추고, 그리고 그들을 죽였다. 먼저 남자들이 가족들을 죽이고 남자 10명 가운데 한 명을 뽑아 그가 나머지를 죽이고 마지막 한 사람 ‘벤 야이르’가 자결하여 서기 73년 4월 15일 마사다에서 저항하던 960여 명 가운데 2명의 여자와 5명의 어린이만이 살아남고 모두 숨졌다. 벤 야이르는 유대 율법에서 엄하게 금하고 있는 자살을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미루지 않고 마지막에 자결하여 죗값을 혼자 감당했다.

유일하게 남은 성전 서쪽 벽에서 통곡

마사다 전투 뒤 로마는 예루살렘을 더욱 철저히 응징했다. 성전을 포함한 모든 건물이 파괴되었고 땅은 가래로 고른 다음 소금이 뿌려졌다. 1차 유대 반란이 진압된 후 로마 황제는 유대인의 할례를 금지시키고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 터에 제우스 신전을 세웠다. 이를 본 유대인들은 또다시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마저 진압한 로마는 유대인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유대인들을 아예 예루살렘에서 내쫓아 버린 것이다. 이후 일 년에 딱 하루, 예루살렘이 함락된 날에만 출입을 허용했다. 그날이 되면 유대인들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전 서쪽 벽에 머리를 대고 나라 잃은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하며 통곡했다. 이후 서쪽 벽은 ‘통곡의 벽(Wailing Wall)’으로 불리었다.

현재 마사다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선서식을 거행하고, 유대 젊은이라면 정신 무장을 위해 필수적으로 찾아와 ‘No more Masada(더 이상 마사다는 없다)’를 외치며 ‘다시는 이런 아픔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는 곳이다. 해외 유대인들은 이곳의 흙을 병에 담아 가져가 침대 머리맡에 두고 조국이 그리울 때마다 그 흙냄새를 맡는다고 한다.

[평신도 종교가 된 유대교]

로마군의 대량학살로 사제 계급 사라지고 평민 종파만 살아남아

예수 당시 유대에는 여러 종류의 종파가 있었다. 최고 정점에 친로마파인 헤롯당과 사두개파가 있었다. 헤롯당은 헤롯 왕가의 지지자들이며, 사두개파는 구전 율법을 배척하고 오직 토라(모세 5경)만을 성서로 받들어 제사장직을 맡은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민중의 지지를 얻고 있었던 계층은 바리새파였다. 이들은 성서와 구전 율법을 모두 지켰다. 율법 학자들이 이 파 출신이었다. 그들은 반로마적이었지만 무력 사용에는 반대했다. 반면 독립을 무력에 호소하는 열심당원들이 있었다.

다른 한편 속세를 버리고 황야와 사해 부근 쿰란에서 금욕적인 공동체 생활을 하는 에세네파가 있었다. 이들은 사악한 제사장들 때문에 성전이 더럽혀졌다고 보았다. 그들은 사막에 살면서 곧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 사이에 종말 전쟁이 일어난다고 보았고, 결국 빛의 아들들이 승리하여 다윗 계통 임금이자 제사장인 메시아가 12지파를 다스릴 것이라고 믿었다. 쿰란 수도자들은 정결법을 철저히 준수하며 독신 생활을 했다. 예수가 올 것을 예언한 세례 요한도 에세네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