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철스님 제공 김해 구산동 수로왕비릉 안에 있는 파사탑.

경남 김해시 구산동 수로왕비릉 안에 있는 파사탑(婆娑塔)은 아마 나라 안에서 가장 오래된 탑일 것이다. 서기 48년 작품이라고 한다. 강한 검붉은 빛을 띠면서 부드러운 재질인 이국적인 아름드리 돌 여섯 개를 켜켜이 올린 단순한 구조다. 만든 것이 아니라 포개놓았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높이 120㎝의 작고 소박한 모습이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허황후는 인도 아유타(아요디아)국에서 김수로왕을 찾아왔다. ‘파사탑’은 탔던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바닥에 깔았던 평형석이라고 한다.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했던 허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가야국 사람들은 땅이 무너진 것처럼 슬퍼했다. 구지봉 동북방 언덕 양지바른 곳에 장례를 치른 뒤 항상 그 은혜를 기렸다. 일생을 함께한 고향의 평형석도 자연스럽게 흠모 대상이 되면서 탑으로 바뀌었다.

가야국 왕도인 경남 김해는 남해 바닷가다. 어업과 항해는 생계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지만 항상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직업이다. 허황후의 영험이 서린 탑 앞에서 뱃길의 안전을 기원한 후 바다로 나갔다. 풍랑을 제압한다는 의미로 진풍탑(鎭風塔)이라고 불렀다. 때가 되면 탑 앞에서 대규모 풍어 기원제도 올렸다. 일부 극성스러운 어부들은 뱃일 나갈 때마다 조금씩 떼서 부적처럼 몸에 지니기도 했다. 바다에서 안전을 지켜준다는 믿음이 결과적으로 의도하지 않은 탑 훼손으로 이어진 것이다. 본래 사각형이던 돌 탑 모서리는 비바람에 따른 자연적 마모까지 더해지면서 하나같이 둥그스름하다.

해안 지역인지라 수시로 출몰하는 해적의 약탈 또한 큰 걱정거리였다. 자연스럽게 왜구를 막아준다는 ‘호국탑’ 이미지까지 더해진다. 일연(一然·1206~1289) 선사는 ’삼국유사’를 집필하면서 항상 현장 답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당연히 이 탑을 찾았다. 그리하여 “허황후만 파도에서 도운 것이 아니라 천년 동안 왜구의 침략을 막았다”고 하면서 두 가지 공덕을 동시에 찬탄하는 헌시까지 남겼다.

조선의 이학규(李學逵·1770~1835)선생도 탑을 찾았다. 파사탑 있는 곳을 물었는데 황량한 절터를 가르키는 것이 아닌가? 탑을 관리하던 호계사(虎溪寺)가 없어지면서 돌탑만 덩그러니 덤불 속에 방치되어 있더라고 했다. 그 안타까움을 ‘낙하생집(洛下生集)’에 기록했다. 이 말을 염두에 두었는지 정현석(鄭顯奭) 김해부사는 1873년 파사탑을 왕후의 능 곁으로 옮긴다. 허황후에 대한 지역민의 사랑은 가야 김씨·허씨 가문뿐 아니라 조선의 이씨와 정씨 등 집안을 구별하지 않을 만큼 길고도 넓었다.

이른 봄햇살이 비치는 날 남녘으로 가는 길에 파사탑을 찾았다. 보호각 나무 창살 앞에서 발걸음이 멈춘다. 대한민국 평범한 집의 공주와 왕자가 서로 이름을 걸고서 남겨둔 사랑의 맹세를 발견한 까닭이다. 허황후와 김수로왕이 만나 백 년 동안 불렀던 행복의 노래는 또 다른 변주곡이 되어 현재 진행형이다. 이제 ‘사랑탑’이란 이름을 하나 추가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