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세계적 제조업 국가다. 전체 GDP(국내총생산)에서 제조업 비율은 27.5%로 일본(20.7%), 독일(19.1%)보다도 높다. 2020년 유엔산업개발기구(UNIDO)가 발표한 세계 제조업 경쟁력 지수에서 우리는 3위를 차지했다. 세계에서 물건을 잘 만들어 많이 파는 최상위권 나라 가운데 하나가 대한민국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성장은 제조업의 성장이었다. 1960년대 많은 신생 개도국이 채택하던 수입 대체 전략 대신 수출을 통한 성장 전략을 채택하면서 제조업은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산업이 되었다. 없는 돈을 털어서 제조업을 지원하기 위해 도로와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시설을 건설했고, 필요한 인력과 기술을 공급하기 위해 교육, 연구 기관을 만들었다. 제조업은 다른 산업보다 많은 사람에게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안정적으로 제공하는 특성이 있다. 제조업이 발전하면서 본격적으로 형성된 중산층은 안정된 사회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어느 국가나 두꺼운 중산층이 형성되는 핵심적 시기는 제조업이 발달하는 기간이고,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쳐나던 시절로 기억되곤 한다.

제조업의 성장은 사회를 변화시켰다. 제조업이 발달한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의 일사불란함과 상명하복이 자리 잡고 있다. 근면 성실과 규칙성이라는 노동 윤리는 사회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사회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획일성과 다양하지 못한 사고방식 역시 제조업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제조업의 핵심은 품질, 비용 및 납기인데 이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이 수십 년 동안 반복되면서 사회가 이에 맞춰 변화했던 것이다. 제조업이 사회를 변화시키고, 개인의 인식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과정이 우리의 현대사다. 이런 면에서 보면 대한민국은 ‘제조업 사회’인 것이다.

발전을 원하는 국가 상당수는 제조업을 육성하고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제조업의 성장은 임금 상승으로 이어지고, 임금의 상승은 제품의 가격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진다. 이것을 극복하려면 더 비싸게 팔 수 있는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주력 분야를 전환해야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많은 국가가 중진국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고전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가발과 합판에서 시작해 조선과 석유화학을 거쳐 반도체와 바이오 의약품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제조업의 변화를 통해 선진국에 진입했다. 대한민국은 제조업과 함께 성장했고, 많은 기업이 세계적 기업으로 변화하였다.

우리의 제조업 성장과 발전은 우리의 노력과 더불어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의 변화 덕분에 가능했다. 때때로 우여곡절을 거치기는 했지만 미국은 지속적으로 관세를 인하하고 국제 교역을 확대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경제성장과 번영을 가져왔고, 우리에게는 수출이라는 새로운 세상과 만나게 해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미국의 제조업은 위축되어갔다. 미국 제조업은 1980년대 초반 인플레이션에 맞서기 위한 대폭적인 금리 인상과 과도한 달러 강세로 몰락하면서 1900만개의 제조업 일자리가 사라졌다. 제조업이 제공하는 안정적 일자리의 소멸은 많은 이를 힘들게 하였고, 미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라진 일자리 가운데 상당수는 태평양 건너 아시아로 넘어오면서 우리에게 1980년대 중반 새로운 성장 기회를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은 공정한 시장 경쟁과 제품·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핵심으로 하는 세계화를 새로운 시대 규칙으로 제시하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무역기구(WTO) 출범과 중국의 WTO 가입은 우리에게 더 큰 시장을 열어주는 기회가 되었고 우리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지금 위치에 올라서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의 흐름이 변화하고 있다. 중국은 제조업을 중심으로 경제를 급속히 발전시켰으며 자연스럽게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되었고, 세계화를 지탱하는 글로벌 공급망의 중심이 되었다. 미국과 중국 관계가 경쟁적 관계로 전환되면서 미국은 새삼스럽게 중국 중심의 글로벌 공급망에 의존하고 있는 자국의 취약성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그 핵심에 있는 제조업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였다. 중국과 경쟁하면서 핵심은 반도체, 인공지능, 이차 전지 등 첨단 기술의 우위라는 사실을 절감한 미국에 첨단 제조업체들이 만들어내는 제품은 더 이상 돈을 주고 사 오면 되는 것이 아닌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존재로 여기게 되었고, 자국에 이러한 핵심 기술에 기반한 제조 기업들을 유치하는 것은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미국이 제조업의 부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많은 것이 변화하고 있다. 금기시되던 국가의 특정 기업에 대한 보조금 지급은 핵심 기술을 갖춘 기업의 유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되었으며, 특정 국가와 기업을 배제하기 위한 차별적 조치 역시 당연한 것이 되고 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40년간 제조업의 쇠퇴를 겪어온 미국으로서는 첨단 제조업에 필요한 인력과 시스템 구축은 쉽지 않은 과제다. 이런 미국에 한국의 대기업들은 가장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존재가 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시장 접근 제한이라는 채찍과 각종 보조금을 포함한 당근을 구사하면서 우리 기업의 미국 투자를 확대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동맹국의 입장은 무시되고 있다. 미국에 지금 필요한 것은 동맹국이 아니라 동맹국의 기업일지도 모른다.

미국이 만들어놓은 틀과 질서에 따라 성장해온 우리로서는 당혹스럽고 낯선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기업들 역시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불편한 상황에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많은 선진국이 경험했던 제조업의 해외 이전에 따른 공동화와 사회 혼란을 피하면서 동시에 동맹으로서 상호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