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다시 핵전쟁의 두려움을 상기시켜 주고 있는 러시아. 신기하고도 불안한 현실이다. 1990년대 초 구소련이 몰락하고 러시아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한국인들이 편하게 러시아로 관광과 유학을 가고, 러시아인들 역시 한국에서 사업과 관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던 러시아가 이제 우크라이나를 침략하고 우리는 유럽 한복판에서 다시 최악의 도시전과 제노사이드(집단 살해)를 목격하고 있다. 어디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단순히 푸틴이라는 한 정치인이 이성을 잃은 걸까? 아니면 우리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푸틴의 정책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는 러시아 사회학자이자 철학자 알렉산드르 두긴(Aleksandr Dugin). 최근 독일 언론에서 그의 믿음을 소개한 적이 있다. 포스트모던 철학에 따르면 어차피 객관적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두긴은 주장한다. 모든 진실은 누군가의 믿음이다. 고로 러시아인들의 믿음은 러시아의 진실이고, 러시아인들의 행동은 러시아의 정의다. 미래 세상은 핵무기로 무장한 러시아, 미국, 유럽, 그리고 중국이 지배한다. 상대방 영토를 침략하면 핵전쟁이 날 수 있겠지만, 각자의 영향권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개별 진실”과 “개별 정의”이기에,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 진실이자 정의라고 두긴은 주장한다. 결국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에 러시아가 간섭하지 않았듯이, 미국도 이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터무니없지만, 푸틴과 러시아 권력층, 그리고 많은 러시아 시민이 믿고 있기에 더욱 더 위험한 두긴의 철학. 현대판 라스푸틴이라고 하는 두긴의 궤변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진다. 인터넷 정보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가짜 뉴스가 늘어나기에 역설적으로 진실과 지식이 사라져가는 오늘날. 인류 보편적 가치와 객관적 진실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암흑한 21세기 미래를, 푸틴과 두긴은 우크라이나에서 미리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