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30대 중반 1인 가구로 사는 프리랜서이자 영화를 찍고 노래도 하고 책도 쓰는 예술인 이랑을 만났다. 밀레니얼 세대의 돈 고민에 금융 전문가가 멘토로서 답해주는 형식으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이랑의 음악과 글을 좋아했던 나는 반쯤은 그를 만나고 싶다는 사심으로 촬영에 나섰다. 이랑의 최근 행보도 특별했던 터였다. 공연이 주 수입원 중 하나인 그는 코로나로 경제적 타격을 입었고, 언제나 열심히 일하지만 소득은 어째서 늘 충분치 않은가라는 고민에 본격적으로 몰입했다고 전했다. 결국 금융에 대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면서 최근 자격증을 따고 보험설계사를 또 하나의 직업으로 삼았다. 이랑은 한 팟캐스트 방송에서 “보험 영업을 하러 가서는 보험의 본질과 역사를 설명하다가 결국 ‘고객님은 새 보험이 필요하진 않겠네요’라고 결론짓곤 한다”며 시원하게 웃었다.

촬영 당일, 이랑이 내게 건넨 이야기는 이랬다. 최근 소액 주식 투자를 시작했는데 돈이 느는 데 재미를 붙여 온종일 스크린만 들여다볼 때도 있다고. 그런데 문득 내가 번 이 돈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하게 됐다고. 최근 기후 위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경제가 발전할수록 환경은 파괴될 수밖에 없는 건 아닌지, 내가 투자한 돈이 어쩌면 환경을 망치는 것인지 두려웠다고. 이랑이 물었다. “가치관을 지키면서 주식에 투자할 방법은 없는 걸까요?”

“ESG 투자라는 게 있어요.” 나는 이렇게 입을 뗐다. 기관 투자자들에게는 이미 새로운 대세로 부상하고 있는 ESG 투자의 개념을 소액 투자자이자 금융 소비자인 이랑에게 설명하며 그의 첫 반응을 목격하는 것은 각별한 경험이었다. 그의 눈이 반가움으로 반짝였다.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을 왜 저는 몰랐을까요?”

/일러스트=김하경

이랑을 포함해 모든 시민의 돈을 대신 운용해 주는 국민연금도 ESG 대세에 합류했다. 지난 11월 국민연금은 2022년까지 ESG 기준을 적용하는 자산군을 운용 기금 전체의 50%까지 확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ESG 투자는 기업의 환경적(Environment)·사회적(Social) 영향과 거버넌스(Governance)를 통합적으로 평가하는 투자를 의미한다. ESG 투자는 2020년 상반기 코로나로 주식시장이 요동칠 때 탁월한 실적을 보이면서 그 성장세에 더욱 탄력받았다.

상장 기업들 역시 ESG 관리에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환경 측면에 방점을 찍는다. 친환경 신사업을 내걸거나 일부 환경 저해 요소를 없애는 것만으로 표면적 개선이 가능하고, 이랑도 언급했듯이 우선 환경 문제에 사람들의 주목이 가장 많이 몰리기 때문이다. 물론 진행 중인 기후변화를 감안하면 오히려 저탄소 비즈니스로의 근원적 변신이 더욱 필요하긴 하다. 그러나 ESG의 중추로서 기업 경영을 사회적·환경적 리스크에 제대로 대응하게끔 만드는 핵심은 거버넌스의 변화에 있다. 투명하고 책임성 있는 거버넌스, 다양성과 포용성을 바탕으로 미래지향적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이사회는 환경적·사회적 임팩트를 드라이브하는 엔진이다.

11월 26일 세계여성이사협회 한국지부는 ‘이사회의 미래: 다양성과 포용성'을 주제로 포럼을 열었다. 지난 8월 개정된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자산 2조원 이상 상장 기업은 이사회를 특정 성별로만 구성해서는 안 된다. 포럼은 이른바 ‘여성이사 의무제’로 표현되는 이번 법 개정을 계기로 거버넌스의 핵심에 있는 이사회의 역할을 되짚어보는 자리였다.

다양성을 확보한 기업이 재무적으로도 더 높은 성과를 낸다는 데이터는 넘치게 많지만, 표면적인 다양성을 맞추고자 여성 이사 1명을 추가하는 것만으로 더 나은 성과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이날 포럼에 참여한 페더레이티드 헤르메스의 크리스틴 초 박사도 이 점을 강조했다. 초 박사는 이사회의 ‘소프트웨어’, 즉 이사회의 소통 방식과 문화가 얼마나 포용적인지, 이사회가 CEO를 비롯한 폭넓은 임원진과 얼마나 원활히 소통하는지가 필수 요소라고 강조했다. 선진적인 거버넌스로 유명한 싱가포르개발은행의 조봉한 사외이사 역시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 이사들은 이사회마다 1000쪽에 육박하는 자료를 받고 실무진 누구와도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서, 깊이 있는 공부와 소통으로 독립적인 관점을 피력하고 의사결정에 기여하는 것이 싱가포르개발은행 이사의 기본 의무라고 했다.

포럼의 연사들이 입을 모았듯 이사회가 토론하고 질문하고 숙의하는 자리가 되는 것이 기본이다. 수적 다양성이 아니라 가치의 다양성이 기업 경영에 담겨야 더 다양한 고객을 만족시키고 더 다양한 리스크에 미리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제야 자본시장의 ESG 혁신이 제대로 뿌리내린다. 그렇게 되어야 가치관에 비추어 거리낌 없이 투자할 수 있길 바라는 많은 ‘이랑’에게 진정으로 기쁜 소식일 것이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