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어느 날 밤 미국 생명공학 회사 연구원 캐리 멀리스가 여자 친구를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 당시 연구 중인 난제, DNA 연속 복제를 풀 아이디어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는 흥분했지만 과학계는 그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엔 실패한 연구였던 셈이다. 그런데 유전자 증폭 기술이 점차 발전하면서 그의 연구가 인정받기 시작했다. 10년 후인 1993년엔 노벨 화학상까지 받았다. 코로나 때 익숙해진 PCR 검사는 이 연구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과학기술 연구는 실패 가능성을 동반한다. 그렇지만 실패를 통해 얻은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연구와 제품을 개발해온 것이 과학기술의 역사였다. 3M 소속 엔지니어 스펜서 실버 박사는 1968년 항공기 제작에 쓸 강한 접착제를 개발 중이었다. 연구는 완전 실패였다. 그가 만든 접착제는 접착력이 너무 약해 붙였다 뗄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연구는 잊혔다가 6년 후 ‘포스트잇’으로 빛을 보았다. 3M엔 이렇게 실패했다가 나중에 빛을 본 제품이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1956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디자인 공모전에서 덴마크 출신 예른 웃손이 제시한 조개껍데기 모양이 당선됐다. 그러나 웃손이 제출한 디자인은 투시도조차 없었다. 설계와 시공을 병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가 발생했다. 공사 기간은 6년 늘어났고 비용도 초기 예상의 15배로 늘어났다. 프로젝트 효율 면에서는 초대형 실패작이었다. 하지만 완공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결국 호주의 아이콘이 됐고 대성공작으로 평가 받는다.
▶자신은 실패로 끝났지만 다른 성공을 낳은 연구도 많다. 개인 이동 수단 세그웨이는 한때 모빌리티 혁신의 상징이었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컴퓨터 발명 이후 가장 혁신적인 기술’이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대당 1000만원 안팎의 비싼 가격에다 초기 시장 형성에 실패하면서 2020년 생산이 종료됐다. 하지만 전동 스쿠터나 킥보드 등 다양한 1인용 이동 수단으로 이어지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서울대가 1000억원을 들여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연구’에 도전하는 ‘SNU 그랜드퀘스트’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동안 성공할 만한 연구만 해온 데서 벗어나 연구 과정을 중시하는 도전적 연구를 하겠다는 것이다. “성공이 아닌 실패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사업 총괄 교수의 말이 인상적이다. 과학의 발전은 누가 봐도 안 될 것 같은 일에 도전해 이루어진 것이다. 서울대의 실험이 큰 성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