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국내 개봉한 영화 ‘포스 마쥬어’는 알프스 스키장으로 휴가 갔다가 눈사태를 만난 가족 이야기다. 남편이 아내, 어린 두 자녀와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눈사태처럼 보이는 눈보라가 일자 혼자 탈출한다. 실제 눈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돌아온 남편에게 아내가 “가족을 버리고 도망갔다”고 힐책하자, 남편은 “도망간 것이 아니라 반사신경에 따라 움직인 것”이라고 변명한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제목 포스 마쥬어(Force Majeure)는 프랑스어로 거대한 힘, 법률 용어로는 불가항력이란 뜻이다.
▶포스 마쥬어(외래어 표기법으로는 포르스 마죄르)는 고대 로마법부터 이어진 면책(免責) 원칙이다. 인간의 능력으로 대응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계약을 이행하지 못했을 때 책임을 면제해 주는 것이다. 초기엔 지진이나 대홍수 같은 천재지변에 주로 적용되다가 차츰 전쟁이나 테러, 수출입 금지나 봉쇄 같은 정부 조치, 코로나 같은 팬데믹 등으로 확대됐다.
▶무조건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측이 불가능하고, 계약 당사자가 통제할 수 없으며, 최선을 다해도 극복하기 어렵다는 3대 요건을 갖춰야 한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으로 아랍 국가들이 석유 수출을 금지한 1차 오일쇼크 때 전 세계 정유업체들이 고객사에 제품을 공급하지 못했지만 3대 요건을 인정받아 면책받았다.
▶반면 미 원전 기업 웨스팅하우스는 오일 쇼크로 우라늄 가격까지 5배로 폭등하자 우라늄 공급을 중단했지만 포스 마쥬어를 인정받지 못했다. 원전 매출을 늘리려 “20년간 우라늄 원료를 파운드당 8달러에 공급하겠다”고 계약한 것이 화근이 됐다. 법원은 우라늄 가격 상승이 “경영상 리스크일 뿐 불가항력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웨스팅하우스가 총 10억달러의 합의금을 물면서 회사 명운이 기울었다. 국내에서도 2008년 리먼 쇼크 때 달러와 엔화 투자로 큰 손해를 본 기업들이 “금융 위기는 불가항력”이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환율 변동은 통상적인 리스크”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란 사태 이후 국내외 석유화학 업체들의 포스 마쥬어 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 안에 갇힌 쿠웨이트 국영석유회사와 카타르에너지 등이 공급을 중단하자 인도네시아 최대 업체인 찬드라 아스리 등 아시아 업체들이 속속 두 손을 들고 있다. 아직 국내에선 최대 에틸렌 생산업체 여천NCC 한 곳만 포스 마쥬어를 선언했지만, 사태가 장기화되면 어떤 업체도 견뎌내기 힘들다고 한다. 사태가 빨리 해결되기만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