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와 평택 일대 비즈니스 호텔들이 반도체 특수로 북새통이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메타 등 실리콘밸리를 호령하는 빅테크 구매 담당자들이 호텔에 진을 치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찾아가 “D램 좀 달라”고 통사정한다. 업계에선 ‘D램 거지(DRAM Beggar)’라는 웃지 못할 별명까지 붙였다. 40여 년 전 우리 반도체 영업맨들이 샘플을 들고 실리콘밸리를 돌며 “한 번만 써달라”고 읍소하던 풍경과는 완전히 상전벽해다.
▶ 요즘 글로벌 빅테크 기업에선 D램 확보 실패는 곧 ‘인사 태풍’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구글에선 메모리 장기 공급 계약을 체결하지 못한 구매 임원들이 짐을 싸는가 하면 MS 임원은 SK하이닉스와의 협상장에서 공급이 어렵다는 말을 듣자 격분해 회의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 애플조차 200% 이상 비싼 프리미엄을 얹어주며 물량을 확보한다. 공급자가 압도적 우위를 점하다 보니 삼성과 SK는 3개월짜리 단기 계약만 해준다. 지금 반도체 시장의 ‘수퍼 갑(甲)’은 명실상부 한국 기업들이다.
▶유례없는 D램 품귀 현상엔 추론형 AI의 등장이 있다. 초기 AI가 데이터를 학습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인간처럼 논리적 단계를 밟아 판단하는 사고의 사슬(Chain of Thought) 과정을 거친다. AI 두뇌인 GPU가 깊은 생각에 빠질 때 실시간으로 받쳐줄 ‘거대한 작업대’가 바로 D램이다. AI가 똑똑해질수록 더 크고 빠른 D램이 절실해지는 것이다. 한때 시스템 반도체에 밀려 천덕꾸러기 취급받던 D램이 AI의 지능을 결정짓는 핵심 엔진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여기에 미국 정부가 엔비디아 H200의 중국 수출 규제를 일부 완화하자, 중국발(發) 주문만 540억달러(약 77조원)어치가 폭주했다고 한다. H200 하나에 최신 HBM(고대역폭 메모리) 6개가 들어간다. 이런 대호황이 올 연말까지 이어지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이 150조원에 달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우리 경제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이 눈앞에 와 있다.
▶43년 전 이병철 삼성 창업 회장은 “철강 1t은 200달러, 컬러TV 1㎏은 20달러, 반도체 1㎏은 2만 달러”라며 반도체 진출을 선언했다. 척박한 환경에서 천문학적 투자를 쏟아부어 일궈낸 D램은 이제 한국 경제의 버팀목을 넘어 인류의 전략 자산이 됐다. 글로벌 빅테크 임원들이 판교까지 찾아와 애원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여기에 취해 있지만 말고 D램을 이을 다음의 혁신을 준비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