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박상훈

세계 수출 시장에서 ‘7000억달러(약 1011조원)’는 꿈의 고지다. 중개 무역이 수출 절반을 차지하는 네덜란드를 제외하면, 이 고지를 밟은 나라는 미국·독일·중국·일본뿐이었다. 거대한 자원과 자본, 인구, 과학 수준, 제국주의의 유산을 가진 나라들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두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나라이거나 승전국들이다. 2차 대전 때 한국이란 나라는 세계 지도에도 없었다. 망해서 식민지가 됐다. 그 한국이 영국·프랑스까지 제치고 7000억달러 고지를 밟고 수출 ‘G5’로 등극했다.

▶정부 수립 해인 1948년 우리 수출액은 1900만달러였다. 한국은 현재 14분 16초마다 당시 1년 치 수출액을 내다 팔고 있다. 세계 최빈국이던 우리가 이제는 전 세계 거실의 TV를 바꾸고, 도로 위 자동차를 점령하며, 첨단 AI 기기의 핵심인 반도체를 공급한다. 원조를 받지 못하면 굶어야 했던 나라가 전 세계 경제의 맥박을 뛰게 하는 핵심 엔진이 됐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말로도 설명하기 힘든 인류 역사상 가장 극적인 경제 기적이다.

▶고도 성장기 한국인에게 수출은 ‘행복’과 동의어였다. 1977년 수출 100억달러를 돌파하며 국민소득 1000달러를 넘어섰고, 1995년 수출 1000억달러를 달성하며 소득 1만달러의 중산층 사회로 진입했다. ‘수출이 늘면 나도 행복해진다’는 공식은 반세기 동안 한국인에게 각인된 성공 방정식이었다. 배고픔을 잊게 해준 것도, 자식 교육시키고, 마이카 시대를 연 것도 수출이었다.

▶한국 수출은 온통 ‘역설’이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가 원유를 수입·정제해 석유화학 제품 수출 세계 5위에 올랐고, 철광석 자급률 0%대인 나라가 포스코를 세워 세계 6위의 철강 대국이 됐다. 6·25 전쟁 당시 소총 한 자루 못 만들었는데 이제 세계 9위권의 방위산업 수출국이 돼 동유럽과 중동, 동남아, 남미의 하늘과 땅, 바다를 지켜준다. 자원이 없어 사람의 머리를 쓰고, 기술이 없어 밤을 새우며 이뤄냈다. 그래서 7000억달러는 성적표 위의 숫자가 아니라 한국인이 흘린 피땀과 눈물의 기록이다.

▶축배의 잔만 들기에 눈앞의 현실이 엄혹하다. 수출액과 소득이 함께 뛰던 공식은 깨진 지 오래고, 성장의 온기도 제대로 퍼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반도체·자동차·조선 등 우리의 핵심 산업과 모두 겹치는 중국의 급부상이 예사롭지 않다. 미국 등의 자국 우선주의 무역 장벽도 갈수록 높아진다. 7000억달러 고지 너머엔 또 다른 전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