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육사를 졸업한 월튼 워커(walker)는 1차 대전 때 기관총 중대장으로 지옥 같던 참호전에서 살아남았다. 2차 대전이 터지자 패튼 장군의 기갑부대 선봉장이 됐다. 패튼과 함께 독일 본토까지 진격했다. 워커의 부대는 진격 속도가 빨라 ‘유령 군단’으로 불렸다. 패튼은 워커에게 “내 군단 중 자네 부대가 가장 공격적”이라며 중장 계급장을 직접 달아줬다. 패튼이 1945년 12월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워커는 가슴을 쳤다.

▶6·25 발발 한 달여 만에 한국은 국토의 90%를 잃었다. 일본의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 한국에 왔다. 미국이 한국 정부의 망명을 검토할 정도로 전세가 급박했다. 워커는 “지휘관은 어디서 싸울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패튼 말대로 최전선을 직접 둘러보고 낙동강에 최후 방어선을 쳤다. 사기가 바닥인 미군 앞에서 “버티거나 죽거나(Stand or die)”라고 했다. 국군에겐 “내가 미국인이지만 죽더라도 이 나라를 지킬 것”이라고 했다. 워커는 미친 듯 전선을 달리며 구멍을 막아냈다.

▶워커 전술은 ‘기동 방어’였다. 적은 병력으로 긴 전선을 막으려면 기동력이 중요했다. 호남을 휩쓸던 북한군 6사단에 마산이 뚫릴 뻔했지만 해병 여단을 긴급 투입해 불을 껐다. 공격으로 방어했다. 혈전이 벌어진 다부동 지역은 백선엽 장군의 한국군 1사단에 맡겼다. 최근 방한한 워커 장군 손자가 “할아버지와 백 장군은 아버지와 아들 같았다”고 했다. 워커가 낙동강에서 버티지 못했으면 맥아더의 인천 상륙도 없었고, 한국도 없었을 것이다.

▶미군은 전투화를 ‘전투 부츠(combat boots)’ ‘군용 부츠(military boots)’라고 한다. ‘워커’로 부르는 것은 한국군이 유일하다. 영어 ‘걷는 사람’에서 나온 콩글리시로 보이지만, 워커 장군과 관련 있다는 얘기도 있다. 전쟁 초 전투화 상자를 보고 한국 노무자가 ‘이거 이름이 뭐냐’고 했는데 미군이 책임자 이름을 묻는 줄 알고 ‘워커’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워커 부대는 낙동강을 건너 북진해 평양에 사령부를 차렸다. 중공군 개입만 없었으면 통일을 이뤘을 것이다.

▶워커 아들도 대위로 참전해 낙동강에서 싸웠다. 1950년 12월 워커 장군은 아들이 받은 훈장을 직접 달아주려고 군용차를 타고 의정부 쪽으로 달렸다. 그런데 국군 트럭과 충돌했다. 지금의 도봉역 부근이었다. 5년 전 패튼처럼 교통사고였다. 워커 장군이 묻힌 미 알링턴 국립묘지엔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오늘(23일)이 워커 장군 75주기다.

일러스트=김성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