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해병대’의 무서움을 알게 된 건 1871년 신미양요 때였다. 미 해병대 병력 1230명이 강화도에 상륙해 조선군과 전투를 벌였다. 쇄국 정책을 펴던 조선을 압박해 개항하게 하려는 미국의 무력 시위였다. 전투는 미 해병대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고, 미 해병대는 어재연 장군의 장군기까지 빼앗아갔다.
▶세계 최초의 해병대는 1537년 스페인에서 만들어졌다. 해군의 작전을 지원하는 ‘해군 보병’이 시작이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지원하는 핵심군으로 성장했다. 미국 해병대는 독립전쟁이 시작된 1775년 필라델피아의 선술집에서 창설됐다. 그 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무너뜨리는 선봉이 되면서 정예군으로 명성을 높였다. 이오지마에서 해병대원들은 악전고투 끝에 수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꽂았다. 그 사진은 미 해병, 나아가 미군 전체의 상징이 됐다. 미 해병대를 모델로 1949년 창설된 한국 해병대는 세계에서 미 해병대 다음의 규모와 전력을 갖고 있다. 미 해병대와의 유대도 각별하다.
▶해병대는 전통적으로 지원병만 받는다. 상륙 작전은 무모할 만큼 위험하기 때문이다. 해병은 숨을 곳 없는 해안에서 적 진지를 뚫고 나가야 한다. 큰 희생이 따른다. 상륙 현장에서 소부대 단위의 임기응변 전투가 불가피해 해병대는 육해공군과 달리 부사관과 병사의 비중이 높다. 미 해병대는 태평양전쟁 때 병력 부족으로 잠시 징집병을 받았다. 해병들은 이 징집병들을 해병대에 대한 모욕으로 느꼈다고 한다. 한국 해병대도 지원병제가 원칙이다. 해병대는 임무상 강한 훈련과 군기가 필수적이다. 한국 해병의 상징 중 하나가 순검(巡檢)이라는 엄정한 군기 잡기였다. 압수수색 수준으로 산천초목이 떨었다는 말까지 나왔다. 용어는 없어졌지만, 그 전통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해병대에 지원하는 젊은이들은 대부분 “한번 하는 군 생활 제대로 하려고 왔다”고 말한다고 한다. 그런데 강한 해병 이미지와 달리 훈련소에는 뜻밖에 몸이 약하거나 성격이 소극적인 젊은이들도 있다고 한다.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려고 해병에 지원한 이들이다. 이런 젊은이들이 해병으로 단련된다. 신병들이 훈련소에서 자주 외치는 구호가 “해병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손이 해병대에 자원 입대해 훈련을 마치고 이달 초 수료했다. 뛰어난 신병에게 주는 상도 받았다고 한다. 수료식에서 아버지 박지만 EG 회장에게 경례하며 울먹이는 사진이 공개됐다. 현대사와 함께 하는 이 가족의 애환이 서려 있는 한 장의 사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