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그룹 창업주 윤석금 회장은 20대 시절 영문(英文) 백과사전 브리태니커 판매 사원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영어 못하는 사람’ 들에게 영어 사전을 팔았다. 자식 교육에 목 마른 부모들에게 “영어라 못 읽어도 거실에 꽂아만 둬도 아이의 꿈이 자란다”고 설득했다. 잦은 전근으로 교육 걱정이 많았던 전방 부대 군인들도 그의 말에 지갑을 열었다. 책이 아니라 부모의 ‘꿈’을 판 셈이다. 입사 1년 만에 전 세계 54개국 브리태니커 세일즈맨 중 판매왕에 올랐다. 전설의 시작이었다.
▶현대차에서 사상 첫 ‘누적 8000대’의 판매왕이 나왔다. 1996년 입사한 최진성 이사(58)가 주인공이다. 40년간 연평균 267대를 판매했으니 공휴일 빼면 매일 한 대씩 판 셈이다. “판매는 하루도 거를 수 없는 끼니”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교통사고로 세 번이나 수술대에 올랐을 때에도 링거를 꽂은 채 의사와 환자를 상대로 차를 팔았다. 판매 후 차가 고장 났다고 하면 새벽에도 달려가고, 고객의 경조사는 꼬박 챙겼다. “한번 고객은 폐차할 때까지 내 고객”이란 우직함이 고객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연간 보험계약액 480억엔(약 4500억원)을 올린 일본의 전설적 보험왕 시바타 가즈코는 고객에게 10만장 넘는 손편지를 썼다. 한국 ‘보험 여제(女帝)’ 예영숙씨는 고객 1600여명을 위해 직접 장을 봐 생일과 제사까지 챙기느라 하루 4~5시간만 잤다. 몸집만 한 가방을 메고 안방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화장품 아줌마, 집집마다 숟가락 갯수까지 꿰던 야쿠르트 여사님들도 우리 주변에 있었다. 을(乙)의 진심과 발품이 마음의 빗장을 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접촉’에서 ‘접속’의 시대로 급변했다. 테슬라는 딜러 한 명 없이 인터넷으로만 차를 팔고, 보험도 인공지능(AI)이 수초 만에 최적 상품을 찾아준다.유명 인플루언서가 라이브 방송에서 1분 만에 수억 원어치를 ‘완판’한다. 소비자에게 다가가는 판매왕의 능력보다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더 정확하고 빠른 시대가 온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인간 판매왕’의 마지막 세대를 보고 있는 것 같다. 클릭 한 번이면 새벽 현관 앞까지 배달되는 편리함 속에서, 물건 하나 팔려고 몇 달을 공들였던 그 투지와 의지는 박물관으로 향하고 있다. 효율과 속도의 디지털 세상이 좋은 점도 많지만 기계는 흉내 못 내는 뜨거운 땀 냄새가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을 것 같다.매일 한 대 씩 30년을 팔았다는 그 기록이 묵직하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