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독일의 신성로마제국이 바티칸 교황청을 침공했을 때 교황을 지키던 병사 대부분이 달아났지만 스위스 근위대는 남아서 침략군과 맞서다가 죽었다. 그 후 지금까지 교황청은 오직 스위스인만 교황 근위병으로 선발한다. 프랑스혁명 때도 당시 루이 16세의 경호를 맡았던 스위스 용병 786명이 왕궁을 지키다 목숨을 잃었다. 왕이 탈출하라고 했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경호 계약을 저버리면 우리 후손들 일자리가 사라진다”며 거절했다. 스위스 루체른에 선 ‘빈사(瀕死)의 사자상’이 그때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

▶스위스 용병을 라이슬로이퍼(Reisläufer)라 한다.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들’이란 뜻이지만 그 속엔 ‘당장의 이득보다 장래의 신용을 소중히 여기는 스위스인’이란 정체성이 담겨 있다. 척박한 산악국가 국민의 절박한 생존 투쟁이 녹아든 단어이기도 하다. 지금은 1인당 소득 10만 달러 부국인데도 스위스인들은 국내에서조차 치열하게 경쟁한다. 나태와 의존은 나라를 퇴보시키는 죄악으로 본다. 심리학자 카를 융은 이런 스위스인의 삶을 ‘만성화된 저강도 전쟁을 치르는 상태’로 규정했다.

▶스위스는 국민투표의 나라다. 1848년 연방 성립 이후 지금까지 670여 안건을 국민투표에 상정했다. 인구 800만명 넘는 나라에서 직접민주주의가 가능한 이유는 스위스인의 높은 시민의식 때문이다. 투표에 임하는 스위스인은 ‘지금 당장 내게 유리한 것’이 아니라 ‘훗날의 스위스와 후손’을 생각하며 투표장에 간다.

▶스위스 국민들이 5000만 스위스프랑(914억원)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부자에게 50%의 상속세를 부과하는 법안을 지난 30일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78%의 반대로 부결시켰다. 통과되면 연 10조원의 세수가 늘겠지만 부자들의 국외 이탈로 그보다 큰 국부가 유출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보통 이런 걱정은 전문가들이 하는 것인데 스위스에선 일반 국민이 한다. 많은 다른 나라에선 “부자 돈을 서민과 나누자”는 투표 결과가 나왔을 테지만 스위스 국민은 달랐다.

▶스위스 국민들은 몇 해 전 매달 300만원씩 기본소득을 제공하자는 제안과 최저임금 인상안을 국민투표로 각각 부결시켰다. 반면 난치병 치료를 위한 배아줄기세포 연구 등 차세대 먹거리 법안은 통과시켰다. 누가 스위스 지인에게 ‘스위스인은 어떤 사람들이냐’고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우리는 내성적이지만 책임감이 강하고 즉흥적이지 않으며 교육 수준이 높다.” 국민이 깨어있으면 나라 망칠 정치 포퓰리즘은 통하지 않는다.

일러스트=이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