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순재가 몇 해 전 모교인 서울대의 ‘관악 초청 강연’ 연사로 후배들 앞에 섰다. 연설 주제는 ‘자부심’이었다. “연기를 오래 하다 보니 이런저런 유혹을 받았다. 그때마다 ‘내가 실수하면 모교 망신 아니야?’라며 유혹을 뿌리쳤다”고 했다. 그는 “자부심 있는 사람은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는다. 여러분도 이를 기억하라”고 당부했다.
▶자부심은 ‘배우 이순재’를 채찍질했다. 부끄러운 연기자가 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다그친 일화가 여럿이다. 대사를 암기할 때 그는 ‘완벽’을 목표로 했다. 사전을 펼쳐 들고 “정(丁)씨는 단음으로, 정(鄭)씨는 장음으로 발음한다”는 그 앞에서 동료들은 혀를 내둘렀다. 1981년 TV 드라마 ‘코리아 판타지’에서 애국가를 만든 안익태 역을 맡았다. 카라얀이 지휘한 곡들을 석 달에 걸쳐 암기한 뒤 “기초라도 가르쳐 달라”며 자신을 찾아온 이순재에게 지휘자 금난새는 고개를 숙였다.
▶후배에게도 엄격했다. 누가 CF가 안 들어온다고 걱정하면 “시끄러워. 대사나 좀 제대로 외워”라고 나무랐다. 교수로 대학 강단에 섰을 때는 일요일도 없이 학생들을 불러내 두 달 넘게 발음 연습만 시켰다. 그런데도 좋아하며 따르는 이가 많았다. 이순재도 “나처럼 친한 이가 많은 사람도 없을 것”이라 자부했다. “아무리 탐나도 남의 배역을 빼앗지 않았고 조언을 구하는 후배에겐 진심으로 대했다”고도 했다. 배우 전광렬이 드라마 ‘허준’의 주인공으로 발탁되자 “모든 걸 바쳐 연기하라. 자식이 훗날 아버지 대표작을 물었을 때 할 얘기가 있어야 할 것 아니냐”며 응원했다.
▶비슷한 배역이 들어오면 피했다. “대발이 아버지로 5~6년은 버틸 수 있다. 그러나 한 작품에서 성공했다고 그 이미지에 갇히면 배우는 그걸로 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야동 순재’로 ‘꽃보다 할배’로 변신을 거듭했다. ‘성공한 배우의 삶을 돌이켜보라’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과거를 느긋이 회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사위를 일찍 잃었다. 지난해 아흔을 맞아 다시 무대에 설 땐 “외손주들 학비를 대기 위해 아직 아프면 안 된다”며 다음 작품 얘기를 했다.
▶배우 이순재가 영면에 들었다. 70년 연기 인생을 마쳤다. 생전의 그는 ‘이순재, 나는 왜 아직도 연기하는가’라는 책에서 배우가 된 이유를 “정년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음 무대는 하늘이다. 모교 친구이자 동료였던 이낙훈이 “함께 연기할 벗이 왔다”며 두 팔 벌려 반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