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치열한 승부가 펼쳐지는 현대의 검투장이지만 1999년 웨스트햄과 에버턴의 경기는 달랐다. 1대1로 팽팽한 접전 상황에서 에버턴 골키퍼가 부상으로 쓰러졌다. 이때를 노려 웨스트햄에서 쏘아 올린 공이 최전방으로 날아들었다. 머리만 대도 골을 넣을 절호의 기회였는데 공격수가 손으로 공을 잡아 경기를 중단시켰다. 득점 기회를 포기한 이유를 묻자 그는 “축구에는 골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했다.
▶대전 월드컵 경기장에서 지난 14일 열린 대한민국과 볼리비아 축구 대표팀 경기에서 우리 선수의 부상을 막아준 볼리비아 골키퍼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공을 향해 몸을 날린 이재성의 머리가 골대에 닿을 뻔하자 골키퍼가 손으로 이재성의 머리를 골대 밖으로 밀어내는 듯한 장면이 포착됐다. 볼리비아 골키퍼가 의도했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의 손이 아니었다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상황이었다. 소셜 미디어에 ‘진정한 페어플레이’ ‘상대 선수도 지켜주는 멋진 동료애’ 같은 찬사가 쏟아졌다.
▶반칙과 눈속임이 난무하는 스포츠판이지만 페어 플레이가 감동을 주는 장면이 적지 않다. 2012년 스페인에서 열린 국제 육상대회에선 압도적 기량으로 1등을 달리던 선수가 결승점을 착각해 멈춰서는 실수를 했다. 2위로 뒤따르던 선수가 알려준 덕에 무사히 결승선을 통과했다. 시상대 정상에 설 기회를 날린 선수는 “나는 떳떳한 2위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독일 축구대표를 지낸 클로제는 현역 시절 ‘정직한 스트라이커’로 사랑받았다. 날아든 공이 자기 몸을 맞고 들어가 골인으로 인정받자 “내 손에 맞았기 때문에 무효”라고 자수한 적도 있다.
▶국내 프로야구에서도 위험한 2루 슬라이딩이 사라지고 몸에 맞는 볼이 나오면 투수가 타자에게 모자를 벗어 사과하는 게 당연한 매너가 됐다. 2019년 도하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앞서 달려가던 선수가 탈진해 주저앉자 뒤따르던 선수가 부축해 결승선까지 수백m를 함께 걸었다. 관중석에서 기립 박수가 터졌다. 승부에만 집착해선 나올 수 없는 장면이다.
▶경기장을 찾는 관중도 승부에만 집착하지 않는다. 어느 조사에서 ‘경기를 보고 행복했던 이유’를 물었더니 ‘승리해서’라는 대답은 14%에 불과했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가 47%로 가장 많았다. 페어 플레이와 동료애의 중요성을 연구하는 ‘스포츠 철학’도 등장했다. 반칙을 포함한 윤리적 일탈을 ‘경쟁의 진실성을 훼손하는 행위’로 규정한다. ‘신의 손’으로 월드컵을 들어 올린 마라도나는 운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