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주 소설 ‘지리산’에 나오는 두 주인공 박태영과 이규는 대한민국 태동기에 활동한 지식인으로 그려진다. 둘은 좌익과 우익으로 갈리지만 공통점이 있다. 뛰어난 암기력과 방대한 독서로 지식을 쌓아 서울대와 동경제대에 입학했다. 교실과 스승을 매개로 하는 지식 축적은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앞서가고 미래를 개척하는 비결이었다.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이 오랜 ‘교실과 선생님’ 구도가 깨지고 있다. 외국어 공부는 교실과 교사가 필요 없어지고 있다. 챗GPT로 외국어 학습 계획을 직접 짜고 AI에 “오늘은 미국과 화상 학술회의를 해” 같은 상황을 제시한 뒤 AI와 해당 외국어로 대화한다. 대화가 끝나면 챗GPT가 문법 오류나 어색한 표현을 잡아준다.
▶최고급 지식도 AI로 접할 수 있게 되자 대학교수의 위상도 크게 흔들린다. 얼마 전 ‘AI 시대 교육의 방향’을 주제로 중국에서 열린 교육학자 세미나에 참석한 한 교수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3일간 난상토론을 벌였는데 마지막 날 ‘잘 모르겠다’며 모두 정신 나간 얼굴로 헤어졌다”고 했다. 한 교수는 “AI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게 교수님 강의 노트를 공개해 달라”는 학생의 요구를 듣고 허탈해했다. 7~8년 전만 해도 최고로 각광받던 컴퓨터 코딩조차 찬밥 신세가 돼버렸다.
▶이런 인식이 대학 교육 커리큘럼 변화를 부르고 있다. 미국 뉴욕의 로체스터대는 올해 ‘챗GPT 활용’ 강좌를 개설했다. AI와 협업해 2020년 이후 최신 연구 성과를 찾아내 에세이를 작성하는 수업이다. 완성한 에세이를 두고 교수와 학생이 토론하는데, 어떻게 AI를 활용했는지 검토하고 더 좋은 에세이를 쓰기 위한 AI 활용법을 찾는다.
▶최근 서울대·연세대·고려대에서 시험 부정 사례가 잇따라 적발됐다. 그런데 이를 전통적인 시험 부정보다는 앞서가는 학생과 낡은 대학 사이의 문명 충돌로 보는 시각이 눈길을 끈다. 학생들의 AI 사용은 대세로 정착했는데 대학 평가는 여전히 암기한 지식을 묻느냐는 지적이다. 생성형 AI를 사용하는 대학생이 작년엔 66%였는데 올해는 92%로 급증했다는 조사도 있다. AI에 “너는 무엇을 가르칠 수 있고 무엇을 가르칠 수 없느냐?”고 물어보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효과적인 교수법을 돕고 지식을 전하고 평가하는 것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판적 사고와 창의성, 공감 능력, 윤리성처럼 인간적 역량을 키우는 스승 역할은 하지 못합니다.” AI 시대에 학생과 선생님 관계는 앞으로 많은 곡절이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