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까지 학교 앞에는 영화나 만화, 세계 풍물을 필름으로 만들어 돈을 받고 보게 해주는 ‘요지경(瑤池鏡)’ 장사들이 있었다. 20장 정도로 된 둥근 필름을 요지경이라는 기계에 넣어 돌려보는 식인데, 그 시절 하나의 오락거리였다. ‘요지’는 중국 고대 신화에 신선들이 살았다는 연못인데, 세상일도 그처럼 알쏭달쏭하다 해서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말이 나왔다.
▶한국 대중음악에 요지경이 처음 등장한 건 1939년 ‘세상은 요지경’이다. 김정구 노래, 조명암(본명 조영출) 작사, 박시춘 작곡이었다. ‘세상은 요지경 속이다/세상은 싸구려 판이다/사랑은 물방아 속이다’ 같은 가사다. 익살과 해학이 있어 당시 만요(漫謠)라 했는데 요즘 말로는 코믹 가요 정도 되겠다. ‘세상은 요지경’을 초등학생까지 따라 부르게 만든 건 1993년 배우 신신애였다. 원곡에 그녀가 가사 일부를 추가했다. 흥겨운 멜로디에 풍자 가사, 눈이 풀린 채 추는 막춤이 어울려 대히트를 쳤다.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산다/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같은 가사가 가치 혼돈의 시대에 공감을 얻었다.
▶”세상 희한하게 돌아간다.” 2020년 청와대 감찰 무마 의혹 사건 증인으로 법정에 섰던 감찰관이 한 말이다. 상부 지시로 A의 감찰이 중단됐는데 A가 좌천은커녕 국회 수석전문위원과 부산 부시장 등으로 승승장구하자 한 말이다. 적폐 청산을 외치며 박근혜 정부 인사들을 대거 단죄했던 문재인 정부가 또 다른 적폐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11일 감사원장 퇴임식에서 노래 ‘세상은 요지경’이 흘러나왔다. 최재해 원장과 기념사진을 찍던 유병호 감사위원이 자기 휴대폰으로 이 노래를 틀며 “영혼 없는 것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최 원장은 문재인 정부 때 임명돼 윤석열 정부를 거쳐 이재명 정부에서 퇴임했다. 유 위원은 최 원장이 윤석열 정부 때의 감사를 조사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자 이를 비판해왔다. 감사원이 정권에 따라 입장을 바꾸는 것을 비판하려 했던 것 같다.
▶‘세상은 요지경’을 작사한 조명암은 ‘선창’ ‘꿈꾸는 백마강’ 등 500여 곡을 만들었다. 일제 말기에는 친일을 하더니 광복 이후에는 열혈 사회주의자로 변신해 1948년 월북했다. 북한에서 문화성 부상을 지내고 최고 문화훈장을 탔다. ‘피바다’ ‘꽃파는 처녀’ 같은 가극도 만들었다. 그가 작사한 ‘세상은 요지경’만큼이나 그의 인생도 요지경이다. ‘세상은 요지경’ 이후 86년, 세상은 지금도 요지경 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