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25세 연구원 제임스 왓슨이 킹스칼리지 연구원 모리스 윌킨스를 찾아갔다. 왓슨은 캘리포니아 공대 연구자가 DNA 구조를 알아냈다고 주장한 논문의 사전 인쇄본을 들고 미국에 뒤져선 안 된다고 윌킨스를 설득했다. 결국 윌킨스는 동료 연구원 로절린드 프랭클린이 찍은 DNA의 X선 회절 사진을 몰래 보여줬다. 왓슨에게 결정적 확신을 준 증거로 밝혀진 이른바 ‘51번 사진’이다.
▶이를 힌트 삼은 왓슨과 동료 프랜시스 크릭은 철사와 금속판으로 DNA 입체 모형을 만들어 화학적 제약 조건을 만족하는 이중나선 구조를 찾아냈다. 이들은 학교 복도와 술집을 누비며 “우리가 DNA의 구조를 알아냈다”고 소리쳤다. 두 달쯤 후 네이처에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논문이 게재됐다. ‘우리는 DNA의 구조를 제안하고자 한다’로 시작하는 900단어 분량의 짧은 논문으로, DNA 구조는 두 가닥의 사슬이 연결된 이중나선임을 밝혔다.
▶왓슨은 자서전에서 프랭클린의 사진을 본 즉시 “DNA는 두 가닥의 서로 꼬인 구조라는 것을 직감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자신의 논문에는 ‘윌킨스, 프랭클린 박사 등의 미공개 실험 결과에서 자극을 받았다’고 모호하게 한 줄 담았을 뿐이다. 프랭클린은 37세에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DNA 사진을 왓슨이 몰래 본 것을 몰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왓슨은 프랭클린 사후 출간한 회고록에서 프랭클린을 “자기가 연구한 데이터를 제대로 해석도 못 하면서 혼자 움켜쥐고 있던 평범한 과학자”로 묘사했다.
▶다윈, 멘델에 비견되는 놀라운 업적으로 노벨상을 받으며 젊은 나이에 큰 명성을 얻은 왓슨은 학계에서 “로마 폭군 황제 칼리굴라 같다”는 평가도 받았다. 하버드대 교수가 되고서도 동료 교수들의 진화론, 분류학, 생태학 등 연구를 “우표 수집”이라고 무시했다. “피부색이 진할수록 성욕이 강하다”라거나 “우리와 아프리카인 지능이 동등하다고 하지만, 흑인 직원을 다뤄본 사람들은 그게 아니란 걸 안다”며 흑인의 지능이 낮다는 인종차별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재정난을 겪다 2014년에는 노벨상 메달을 경매에 내놓았다. 노벨상 수상자가 메달을 팔려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인종차별 입장을 계속 유지하다 결국 모든 명예직까지 박탈당했다. 그는 DNA의 비밀을 풀어 생명의 설계도를 세상에 내놓았지만, 끝내 자신의 유전자는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과학의 영광과 인간의 오만, 그 빛과 그림자를 한 몸에 품고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났다.
곽수근 논설위원·테크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