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무렵 북한의 20대 김영남은 북한군 입대가 아니라 모스크바 유학을 갔다. 북의 미래 인재로 뽑힌 것이다. 몇 년 뒤 귀국했는데 김일성 세력과 연안파(친중), 소련파의 권력 다툼이 치열했다. 1956년 ‘종파 사건’으로 연안파와 소련파가 몰락했다. 갓 귀국한 덕에 김영남은 소련파로 몰리지 않았고 목숨을 부지했다. 김일성식 정치를 일찌감치 체험했다.

▶40대 중반에 노동당 외교를 총괄하는 국제부장이 됐다. 김일성 딸 김경희가 국제부 1과장, 그 남편 장성택이 6과장이었다. 김일성 일가와 인연이 생긴 것이다. 1983년엔 외교부장에 올랐다. 그런데 그해 10월 북이 아웅산 테러를 저질렀다. 1987년엔 KAL기 폭파 테러도 일으켰다. 세습 권력을 굳히려는 김정일의 도발이었다. 북 소행이란 증거가 세계에 다 드러났는데도 김영남은 낯빛 하나 안 바꾸고 “남조선 자작극”이라고 선전하고 다녔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북한이 자신들 우방국에 ‘불참’을 요구하는 외교 대표단을 보냈다. 김영남이 단장으로 동유럽과 아프리카를 돌았지만 성과가 없었다. 그러자 김영남은 ‘수령님 명령을 받들지 못했는데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느냐’며 세 끼를 굶었다고 한다. 이를 김일성 일가가 보고받았다. 빈손 귀국이었지만 문책은 없었다. 외교부장인데도 대사 인사 등 자기 권한을 쓰지 않았다. 자기 운전기사와 여비서까지 당에서 정해 달라고 부탁했다.

▶은둔형인 김정일이 1998년 김영남을 명목상 국가수반에 앉혔다. 2007년 이집트 관영 통신사가 “김정일이 방문한다”고 보도했다. 김정일의 첫 비행기 외유인 줄 알고 세계가 주목했는데 그 ‘국가수반’은 김정일이 아니라 김영남이었다. 김영남은 1994년 김일성 추도사와 2011년 김정일 추도사를 모두 읽었다. 김정은이 아버지 측근을 숙청할 때도 김영남은 자리를 지켰다. 장성택이 끌려 나가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지켜봤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김여정과 방한했는데 90세인데도 손녀뻘인 김여정에게 먼저 자리를 앉으라고 권했다.

▶3일 김영남이 97세로 사망했다. 김씨 왕조 3대에 걸쳐 단 한 번도 좌천, 혁명화 없이 자리를 지킨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잘못 졸기만 해도 처형당하는 북에서 ‘명목상 수반’만 21년을 지낸 김영남의 처세술은 처절한 수준이다. 그와 같이 근무한 탈북 외교관은 “조용하지만 누군가 자신에게 ‘2인자’라는 말을 하면 격노했다” “자기 견해도 없고, 손에 지문도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저승에서도 김씨 일가에 손바닥을 비빌지 궁금하다.

일러스트=김성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