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양진경

인류 문명사에서 금에 대한 기록은 6000년 전 메소포타미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으로 다양한 장식과 투구를 제작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변하지 않는 금을 ‘신의 살’이라 부르며 숭배했다. 삼국시대 신라도 금과 관계가 깊었다. 신라 김씨 계열 왕들의 시조인 김알지가 금궤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국제사회에도 금이 많은 나라로 알려졌다. 8세기 일본서기에는 ‘눈부신 금은 채색의 나라’로, 10세기 이슬람 기행문엔 ‘금실로 수놓은 비단으로 집을 장식하고 금그릇에 밥을 먹는 나라’로 적혀 있다.

▶5세기 신라는 최고의 금세공 기술 보유국이었다. 금속판 표면을 톱이나 끌로 음각하는 투조(透彫), 망치를 써서 금속판에 무늬를 넣는 타출(打出), 보석 표면에 금실이나 금 알갱이 무늬를 덧대는 감옥(嵌玉) 기법은 당시로선 첨단 기술이었다. 2016년 경주 월지에서 발견된 ‘선각단화쌍조문금박’은 100원 동전보다 작은 크기의 순금 화폭에 두께 0.05㎜ 가는 선으로 비둘기 두 마리를 새겨 현대인조차 감탄하게 했다.

▶1921년 9월 경주에서 출토된 금관총 금관이 신라 금관 발굴의 시작이었다. 금관 발굴은 곧장 세계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금관총 한 곳에서만 반지·팔찌·허리띠·귀걸이 등 7.5㎏이나 쏟아져 나오며 ‘황금의 나라 신라’가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1926년 서봉총 금관 발굴엔 고고학자였던 스웨덴의 아돌프 왕세자가 참여했다. 신라 금관의 특징인 나무와 뿔 모양 장식이나 곡옥 등에 깃든 의미는 국제 학계의 연구 대상이다. 1933년 벨기에 켄트대는 정면 세움 장식이 하늘과 땅을 잇는 신성한 나무이며 뿔은 신라인의 사슴 토템을 보여준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신라 금관은 총 6점인데 이 중 3점은 일제 때 발굴됐다. 화려한 자태와 명성 때문에 수난도 겪었다. 1935년 일본인 평양부립박물관장이 총독부에서 서봉총 금관을 빌려 전시한 뒤 기생의 머리에 씌워 기념사진을 찍다가 곡옥 일부가 파손됐다.

▶한반도의 금관은 가야에서 출토된 2점까지 포함해 총 8점이다. 고대 금관은 학자마다 주장하는 숫자가 20~60개로 편차가 크지만 신라 금관의 비율이 가장 높고 예술적 완성도도 최고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신라 금관 6점을 한자리에서 보는 전시가 28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개막했다. 마침 에이펙(APEC) 정상회의가 경주에서 31일부터 이틀간 열린다. 각국 정상이 신라 금관을 감상하며 첨단 기술 국가 한국의 원류를 느끼리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