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에서 A의 이름을 검색하면 수백 개 계정이 뜬다. 개별 계정이지만, 프로필 사진은 같은 인물이다. 단, 머리 스타일과 의상이 그때그때 다르다. 단발·긴 머리·생머리·파마머리와 군복·원피스·청바지 등을 요령 있게 조합했다. 직업은 다마스커스 파병 미군이었다가 국경 없는 의사회 의사일 때도 있고, 가끔 UN 직원이기도 하다. 단, 달라지지 않는 자기 소개가 있다. ‘싱글’이다.
▶로맨스 스캠은 마치 사귈 것처럼 이성에게 접근해 채팅 등으로 신뢰를 쌓은 뒤 돈을 받아내는 사기 수법이다. 40대 독신남인 후배가 A의 페이스북 친구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사기라는 걸 알면서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그가 대화를 시작했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사연이 시작됐다고 한다. 미국인 아빠와 한국인 엄마 사이에 태어났지만 열 살에 부모님을 교통사고로 잃고, 다마스커스에 파병되어…. 이 사기의 예외 없는 4단계가 있다. 접근, 신뢰와 애정 형성, 금전 요구, 잠적이다.
▶배우 이정재를 사칭한 일당이 이 수법으로 50대 여성에게 접근해 5억원가량을 가로챘다고 한다. 당연히 처음부터 돈을 요구한 게 아니다. 몇 달에 걸친 신뢰 구축이 있었다고 한다. AI로 만든 공항 셀카 사진과 위조 신분증으로 친밀감을 쌓은 뒤 “하니(honey), 우리의 미래가 달렸어” 등의 메시지를 보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사랑이라는 포장지로 피해자의 이성적 판단을 덮었다고 한다.
▶이 분야 전문 용어로 ‘돼지 도살’이란 잔혹한 표현이 있다. 사기꾼들은 장기간에 걸쳐 애정과 희망이라는 먹이를 준다. 그렇게 돼지의 살을 찌우는 것이다. 간혹 소액 투자를 성공시켜 주기도 한다. 그렇게 피해자의 탐욕도 살찌운다. 그러고는 결정적 순간에 돈을 받아내(돼지 도살) 사라진다. 경찰청에 따르면 로맨스 스캠 국제 사기단은 나이지리아·라이베리아 등 아프리카 국적 흑인이 많았고, ‘하니’ ‘여보’ 등의 문자를 보낸 한국인 가담자는 전신에 문신을 하고 있었다. 물론 A의 얼굴을 한 미녀는 존재하지 않았다.
▶로맨스 스캠의 핵심은 분별력이 아니라 감정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바보같이 왜 뻔한 사기에 당하느냐고 하지만, 그만큼 외로운 사람이 많다는 뜻도 된다. 현대사회의 고독은 단순한 개인 문제를 넘어 사회적 질병이다. 가장 최근 통계인 2023년의 고독사 사망자 수는 3600명을 넘었다. 로맨스 스캠 피해액은 중장년층이 크지만, 피해자 숫자는 30대 이하가 87%로 가장 많다고 한다. 친구도 연인도 없는 요즘 청년들이 위태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