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발가락이 닮았다’를 쓴 소설가 김동인은 1920년대 후반 조선일보 학예부장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문화부장이다. 성격이 불같기로 유명한 그는 후배들이 써 온 기사가 맘에 안 들면 원고를 집어던지며 “당신, 기자 맞아?”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당시 기자(記者)는 사실을 기록하는 자일뿐만 아니라, 우국충정의 지식인이라는 상징적 의미까지 포함했다.
▶라틴어 디우르날리스(diurnālis)는 ‘날마다의’라는 의미의 형용사다. 여기서 유래한 프랑스어 주르날(journal)은 매일 쓰는 일기나 신문을 뜻한다. 영어 단어 저널리스트가 여기서 왔고, 메이지 유신 때 일본이 서양식 신문을 도입하며 이 단어를 ‘기자’로 번역했다. 그래서 초창기 기자는 일간 신문의 저널리스트로 한정됐다.
▶순(旬)에서 알 수 있듯, 1883년 창간한 최초의 근대적 신문 한성순보는 일간이 아니라 열흘에 한 번 발행했다. 그때는 기자라고 하지 않고 기재원(記載員)으로 부르거나 탐보인(探報人)·채방인(採訪人)처럼 조선 말에 쓰던 표현을 혼용했다. 정보를 탐색하고 알리는 직업, 정보를 캐고 현장을 찾는 사람인 것이다. 유길준도 1895년 ‘서유견문’에서 신문기자를 탐보인으로 불렀다. 근대 이전 조선에는 관보 격인 ‘조보(朝報)’가 있었다. 1577년 발행된 조보에 인성왕후의 쾌유를 비는 기도회가 광나루에서 열렸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기사를 쓴 사람이 어쩌면 근대적 의미의 탐보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언론사 연구 권위자인 한국외대 정진석 명예교수가 신작 ‘한국언론 연대기’에서 한국 최초의 기자는 이승만 대통령이라고 썼다. 최초의 직업 기자라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기록에서 기자로 불린 최초의 인물이란 의미다. 1898년 9월 14일 자 제국신문 논설에 ‘기자 이승만’이란 표현이 처음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앞에서 말한 탐보인, 기재원 등으로 부르거나 아예 편집인, 주필 등 직함으로 소개했다.
▶이승만은 1898년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을 창간했다. 이후 서재필이 만든 독립신문 등 여러 신문에서 주필로 활약하며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백성들이 신교육을 받고 스스로 깨어나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썼고, “사람이나 나라나 자기가 제 일을 해야 한다”며 자주독립을 외치다가 1899년 투옥되기도 했다. 요즘은 수많은 개인이 1인 미디어를 자처한다. 그 모든 사람들이 사실을 찾고 진실을 추구하는 기자 본연의 역할을 항상 생각했으면 한다. 기자의 또 다른 이름으로 와닿은 것은 ‘채방인’이다. 사실을 캐내고, 현장을 찾는 것이 기자가 하는 일의 처음이자 끝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