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유럽 출장 중 처음으로 영국박물관을 방문했다가 박물관에 대해 갖고 있던 인식을 바꾸게 됐다. 이집트의 로제타 스톤과 스핑크스, 중동의 아시리아 유적지에서 나온 석상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에서 반출한 조각상이 줄줄이 이어졌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모나리자와 밀로의 비너스 앞에서 넋을 잃었다. 두 곳 모두 한 나라의 박물관이라기보다 세계사 박물관이었다.
▶루브르는 방문객 기준 세계 1위 박물관이다. 2등은 바티칸박물관이고 3등은 영국박물관이다. 루브르는 연간 800만명이, 바티칸과 영국박물관은 500만~600만명이 찾는다. 방문객 기준, 세계 10대 박물관이 대개 유럽과 미국에 포진해 있다. 메트로폴리탄(미국), 테이트모던(영국), 오르세(프랑스), 프라도(스페인) 등이 단골로 들어간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하기 전에는 예르미타시(러시아)도 들어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국박)의 올해 방문객이 지난 15일로 500만명을 넘어섰다. 루브르·바티칸·영국·메트로폴리탄에 이어 방문객 기준 세계 5위로 발돋움했다. 모나리자처럼 세계인을 매혹시키는 킬러 콘텐츠가 없고, 한때 대만의 타이베이 고궁박물원과 중국의 베이징 고궁박물원에도 밀리며 20위 밖으로 처졌던 것을 떠올리면 기적과 같은 성과다.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가 1등 공신으로 꼽힌다. 케데헌이 공개된 6월에 45만명이던 관람객이 7월 72만명, 8월 84만명으로 급증했다. 국박이 준비하고 있다가 기회를 잡은 것도 주효했다. 케데헌에 등장하는 까치·호랑이·갓은 몇 해 전부터 방문객들에게 인기 있던 이른바 ‘뮷즈(뮤지엄 굿즈)’였다. 전시만 보고 떠나는 기성세대와 달리 굿즈를 소유하기 위해 기꺼이 주머니를 여는 세대도 등장했다. 이런 변화를 국박이 포착했다. ‘까치 호랑이’ 배지를 비롯해 술을 부으면 잔에 새겨진 선비 얼굴이 붉어지는 술잔 같은 뮷즈를 사려고 외국인까지 오픈 런에 가세한다.
▶‘관람객 500만명 돌파’는 국박에 숙제도 던졌다. 무엇보다 ‘케데헌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 외국인 관람 비율이 70%를 넘나드는 루브르나 영국박물관처럼 세계 속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거듭나야 한다. 국박의 외국인 관람 비율은 올해 처음 5%를 넘었다. 신라의 반가사유상 두 점을 함께 전시하는 ‘사유의 방’을 2021년 선보인 이후 관람객이 부쩍 는 것도 주목하게 된다. 사유의 방 사례처럼 신선한 전시 아이디어도 부지런히 내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