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 의원이 충남고 1학년 때였다. 48등 친구에게서 “너, 공부 좀 해야겠다”는 말을 들었지만 웃고 말았다. ‘반 61명 중 너 같은 48등이나, 나 같은 58등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었다. 공부보다는 음악이 좋았다. 그러나 “너 대학은 갈 거냐”고 묻는 아버지에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생후 6개월 만에 소아마비가 된 장애인 아들은 그때 공부를 시작했다.

▶충남대 법대에 갔지만 노래가 먼저였다.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다 아버지 친구한테 들켜 아버지에게 생전 처음 매를 맞았다. 대학 재학 중 사법시험 1차에 붙은 이상민은 “혹시 나 천재 아닐까” 생각도 했지만 그게 화근이었다. 고시 낙방이 9년 이어졌다. 그래도 아버지는 신림동 고시촌의 그가 대전에 올 때마다 기죽지 말라며 새마을호 특실을 끊어줬다. 10년 만에 합격해 의기양양하게 새마을호를 타고 집에 갔더니 아버지가 화를 냈다. “건방지게 네가 무슨 새마을호냐”고 했다. 겸손하게 살라는 가르침이었다.

▶돈 잘 벌던 변호사는 2004년 ‘탄돌이’로 국회의원이 됐다. 노무현 탄핵 역풍으로 열린우리당이 예상 밖 152석을 얻었고, 통제 불능 초선 108명을 ‘108 번뇌’라고 했다. 이상민도 그중 한 명이었다. 2012년 대선 때 이상민은 문재인 캠프 공동본부장을 맡았다. 나중에 그들은 대통령 비서실장, 대사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이상민은 문재인을 비판하며 비주류로 남았다. 이재명 대표도 비판했다. 앞만 보고 직진만 하는 의원이었다.

▶당내 비주류였지만 대전에서 5번 연속 당선됐다. 초기에는 지팡이를 짚고 다녔지만, 나중에는 휠체어에 의지해야 했다. 그래도 대전을 떠나기 싫어한 어머니 때문에 KTX로 서울~대전을 왕복 4시간 출퇴근했다. “음악도 듣고 드라마 ‘아저씨’도 보고 지역구민들과 인사도 하고 좋다”고 했다. 전쟁 같은 정치 현장에 있으면서도 술 몇 잔 하면 “이 음악 좋지 않으냐”며 휴대전화로 음악을 들려줬다.

▶이상민은 “나도 튀고 싶어 한 정치인이었다. 의원 300명 중 150명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게 정치라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고 했다. 사람을 설득해 일하는 것, 그게 정치였다. 친명계 의원들은 5선인 그에게 “배신자 축출”을 외쳤다. 그가 결국 탈당하자 민주당에선 쓴소리가 사실상 사라졌다. 그 결과가 지금 보는 민주당이다. 이상민 전 의원이 갑자기 타계했다. “한 걸음 전진을 위해 300명이 조금씩 양보하는 게 정치”라고 한 그의 말을 국회 어딘가에 걸어 뒀으면 좋겠다.

일러스트=김성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