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기 제트엔진의 핵심 부품인 터빈 블레이드는 성인 손바닥만 한 쇳조각이지만 가격은 한 개당 1000만원 수준이다. 이 블레이드 수백 개가 1분에 1만 번 넘게 회전하며 섭씨 1500도가 넘는 고온의 연소 가스를 맞는다. 녹아내리지 않는 비결은 블레이드 내부에 공기가 흐르는 미세한 길을 뚫는 냉각 기술에 있다. ‘기계공학의 꽃’이라 불리는 이유다. 이 기술을 지상 발전소용으로 옮겨온 것이 가스터빈이다. 제트엔진이 강력한 배기가스로 추력(推力)을 얻는다면 가스터빈은 회전력으로 전력(電力)을 만든다.

▶이 기술은 미국·독일·일본·이탈리아 등 4국만 보유한 철옹성 영역이었다. 이 ‘꿈의 기술’에 우리가 도전장을 낸 게 2013년이다. 정부가 600여억 원, 두산에너빌리티가 1조원을 쏟아부었지만 쉽지 않았다. 좌절의 문턱에서 나온 해결책 중 하나가 바로 3D 프린팅이었다. 특수 합금 분말을 레이저로 녹여 쌓자, 인간의 손으론 불가능했던 복잡하고 정교한 블레이드 내부 냉각 통로가 만들어졌다. 2019년, 마침내 ‘메이드 인 코리아’ 가스터빈이 탄생했다. 불가능해 보였던 기술 독립을 이룬 쾌거였다.

▶그전까지 우리 건설사들은 중동과 동남아에서 수조 원짜리 발전소 공사를 따내고도 속앓이를 했다. 발전소의 심장인 가스 터빈을 전량 미국 GE나 독일 지멘스, 일본 미쓰비시에서 사와야 했기 때문이다. 공사비의 20~30%가 외국 기업에 넘어갔다. 부품 교체나 유지·보수를 할 땐 이들이 부르는 게 값이었다. 심지어 보안을 이유로 차단막을 치고 작업해 우리 기술진은 들여다볼 수도 없었다.

▶그랬던 우리가 발전용 가스터빈을 종주국 미국의 발전 시설에 처음 수출하게 됐다. 외국 업계 소식통에 따르면, 일론 머스크의 AI(인공지능) 기업인 xAI의 데이터센터에 납품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성과엔 수만 개의 관련 부품을 하나 하나 국산화해 온 340여 개 국내 중소·중견 협력 업체의 땀도 빠질 수 없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함께 쓴 집념의 드라마라는 평가가 그래서 나온다.

▶AI 시대는 전력 전쟁의 시대다. AI 반도체가 미래 산업의 두뇌라면, 가스터빈 같은 에너지 기술은 그 두뇌를 뛰게 할 심장이다. AI 반도체를 우리가 주도하듯, AI가 쓸 전기를 만드는 발전 기술과 전기를 보내는 변압기 기술도 우리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안정적으로 전기를 생산하는 가스터빈 기술은 반도체 못지않은 전략 자산이 될 수 있다. 반도체 신화에 이어, ‘K에너지’도 대한민국의 새 미래를 써 나가길 기대한다.

/일러스트=이철원